Ⅰ. 고조선은 어느 나라를 말하는가
☞ #윤내현 (尹乃鉉) 전 단국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1. 고조선은 단군조선(檀君朝鮮)만을 일컬어야 한다
우리가 어떤 문제에 대해 말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밝혀야 할 점은 말하려는 대상에 대한 명칭과 그 개념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같은 명칭에 대해 사람마다 다른 개념을 갖는다면 논의가 바르게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먼저 논의의 주제인 #고조선 이라는 명칭에 대한 개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새삼스럽게 고조선이라는 명칭에 대해 말하려는 것은 그것이 바르게 인식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 때문이다.
현존하는 문헌 가운데 고조선이라는 명칭이 맨 먼저 등장한 책은『 #삼국유사(三國遺事) 』이다.
『 #삼국유사 』에는 ‘ #고조선(古朝鮮) ’조가 있으며 고조선에 대해 저자는 ‘ #왕검조선 (王儉朝鮮)’이라는 주석을 달아 놓았다. ‘고조선’조의 내용은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왕검 이 출생하기 이전의 상황을 전하는 이른바 #단군신화 (檀君神話)와 단군왕검이 건국한 #단군조선 (檀君朝鮮)에 관한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 (一然)은 단군조선의 국명은 #조선(朝鮮) 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조선이란 옛날에 있었던 #조선 즉 고대 조선이라는 뜻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왕검조선이라고 부르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던 듯한데 왕검조선이란 왕검이 세운 조선이라는 뜻일 것이다.
오늘날 일부 학자들은 고조선을 이와는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단군조선과 #위만조선 (衛滿朝鮮)을 합하여 고조선이라 부르는 것이다. 위만조선도 옛날에 있었던 조선이므로 고조선에 포함시켜도 괜찮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삼국유사』에서는 ‘위만조선’조를 독립시켜 놓았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단군조선과 위만조선은 그 성격이 전혀 다른 나라이다. 단군조선은 #한민족(韓民族) 이 그들의 지도자인 왕검(王儉)을 내세워 최고 통치자인 #단군(檀君) 으로 모시고 세운 나라이다.
그러나 위만조선인 중국 서한(西漢)의 망명객인 #위만 (衛滿)이 세운 나라이다. 이렇게 건국자와 지배층의 민족 성격과 혈통이 다른 왕조를 같은 왕조에 포함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이는 두 개의 다른 왕조를 같은 혈통의 왕조로 잘못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위만은 중국에 살고 있었던 조선계였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근거는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단군조선과 위만조선은 건국과정이나 통치자의 계보가 전혀 다르다.
따라서 단군조선과 위만조선은 다른 왕조로 구별하여 서술하는 것이 옳다. 다시 말하면 고조선은 단군조선만을 일컬어야 하는 것이다.
위만조선을 고조선에 포함시켜 서술할 경우 성격이 다른 두 개의 왕조를 동일한 혈통의 왕조로 혼동할 수 있다는 점 외에 아주 중요한 문제가 발생한다.
#한국고대사 의 체계에 큰 오류가 발생할 뿐만 아니라 한민족은 고대부터 중국인들의 지배를 받은 미개한 사람들이 되고 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개설서나 국사교과서에는 고조선에 단군조선과 위만조선이 포함되어 있는데, 위만조선은 단군조선을 계승해서 동일한 곳에 있었으며 위만조선이 멸망하자 그곳에는 #한사군 (漢四郡)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한사군은 #낙랑군 (樂浪郡)· #임둔군 (臨屯郡)· #진번군 (眞番郡)· #현도군 (玄菟郡) 등 서한(西漢)의 행정구역을 말한다.
이러한 현행 #상고사 체계는 사실과 다르다. 위만조선은 단군조선을 계승하지도 않았고 단군조선과 동일한 곳에 있지도 않았다.
중국의 고대 기록에 따르면, 위만은 #기자(箕子) 의 후손인 #준왕(準王) 의 정권을 빼앗아 위만조선을 건국하였다. 그런데 한국사개설서나 국사교과서에는 준왕이 #기자 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단군조선의 마지막 국왕이었던 것처럼 서술되어 있다. 그 결과 위만은 단군조선의 정권을 빼앗아 위만조선을 건국한 것이 되어 사실과 전혀 다른 #고대사 체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기자는 중국에서 #상(商) 과 #주(周) 가 교체되던 시기의 인물로서 #주나라 초기인 서기전 1100년 무렵에 조선으로 망명하였다.
기자가 망명했던 곳은 고조선(단군조선)의 서부 변경인 지금의 #난하(爛河) 유역으로 #갈석산 (碣石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기자는 그곳에 자리를 잡고 고조선의 거수국(渠帥國)이 되었는데 그의 40여대 후손인 준왕은 서기전 190년 무렵 위만에게 정권을 빼앗겼다. 그러므로 위만조선은 #난하 동부 유역에 있었다.
2. 위만조선은
고조선에 포함될 수 없다
『삼국유사』‘고조선’조에는 기자가 고조선으로 망명해 온 뒤 고조선은 도읍을 #장당경 (藏唐京)과 #아사달 (阿斯達)로 두 번 옮겼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기자 정권이 고조선의 서부에 자리했고, 고조선은 그 동쪽에 계속 존재하면서 도읍을 옮겼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자 정권을 무너뜨린 위만조선은 고조선의 서쪽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위만조선은 건국 후 동쪽으로 고조선을 침략하여 지금의 #대릉하 (大凌河)까지 그 영토를 확장하였다.
서기전 108년에 한황(漢皇) #세종 (世宗)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그곳에 낙랑군(樂浪郡)·임둔군(臨屯郡)·진번군(眞番郡) 등 3개의 군(郡)을 설치한 뒤 여세를 몰아 동쪽으로 고조선의 서부를 침략하여 지금의 #요하(遼河) 까지 빼앗아 대릉하와 요하 사이에 현도군(玄菟郡)을 설치하였다. 이렇게 되어 지금의 난하와 요하 사이에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기자 정권과 위만조선의 흥망, 한사군의 설치 등은 고조선의 서부 변경 지대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으며, 고조선인 한사군이 설치된 이후까지도 요하 동쪽에 그대로 존속하고 있었다. 기자 정권과 위만조선 그리고 한사군은 성격을 달리하고 있었다.
기자 정권은 고조선의 거수국이었으며 위만조선은 #서한 의 외신(外臣)으로서 고조선과는 대립관계에 있었고 한사군은 서한의 영토에 편입된 행정구역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기자 정권과 위만조선 그리고 한사군에 대해서 크게 잘못 이해하고 있다. 기자가 망명한 곳은 고조선의 중심부인 지금의 평양이었고 기자는 단군의 뒤를 이어 고조선 전체를 통치했다고 믿고 있다.
『 #제왕운기 (帝王韻紀)』에는『삼국유사』의 기록과 달리 고조선이 망한 후 기자가 그곳에 와서 새로 나라를 세운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모화사상 (慕華思想)에서 나온 것인데 중국 문헌의 기록들과도 맞지 않는다.
대부분의 조선왕조 시대 학자들은 불교 승려 일연의『삼국유사』기록보다는 유학자 #이승휴 (李承休)의『제왕운기』기록을 따랐다.
기자가 지금의 평양에서 고조선 전체를 통치했다면, 위만은 그곳에서 기자의 후손인 준왕의 정권을 빼앗아 위만조선을 세운 것이 되어, 단군조선과 기자 정권 그리고 위만조선은 같은 곳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위만조선이 망한 후 그곳에 한사군이 설치되었으므로, 한사군도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 체계가 현행 국사개설서와 국사교과서에 고대사 체계로 반영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기자는 삭제되고 기자의 후손인 준왕이 단군조선의 마지막 국왕으로 서술되어 있는 것이다. 중국계인 준왕이 한민족의 혈통으로 둔갑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행 한국 고대사 체계는 매우 큰 문제를 일으킨다.
즉, 한민족은 고대부터 #이민족 의 지배를 받은, 능력이 없는 민족이 되고 마는 것이다. 중국에서 망명해 온 기자와 위만 일족의 지배를 받다가 결국은 한사군의 설치로 중국에 통합되고 마는 것이다. 그 기간이 무려 1400여년이나 된다. 역사는 사실대로 기술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대로 서술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러한 고대사 체계가 옳다면, 한민족의 역사는 이민족의 식민지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외래문화인 불교나 유학이 들어오기 전 한국에는 독자적인 문화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는 것이 된다.
사람에 따라서는 불교나 유학을 한민족의 문화로 생각하고 있다. 이것들이 한민족 전통문화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한민족의 문화처럼 된 외래문화이지 한민족의 고유문화는 아니다.
이러한 모든 문제들은 현재 통용되는 고대사 체계가 사실과 다른 데서 말미암는다. 기자 정권·위만조선·한사군은 고조선의 서부 국경지대에 있었으며 이것들이 존재하던 시기에도, 고조선은 그 동쪽에 존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민족은 고조선의 붕괴로 비록 #동부여 (東夫餘)·읍루(挹婁)· 고구려 (高句麗)·동옥저(東沃沮)·동예(東濊)· #최씨낙랑국 (崔氏樂浪國)· #삼한(三韓) 등의 여러 나라로 분열되기는 했지만, 이들 나라는 모두 고조선을 계승한 한민족의 나라였다.
그러므로 고대에 한민족은 이민족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고대사 체계는 1400여년 동안 이민족의 지배를 받은 것처럼 서술되어 있다.
그 결과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많은 문제점을 낳고 있다. 따라서 한국고대사 체계는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고조선의 명칭은 위만조선이나 한사군을 포함하지 않은 단군조선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3. 왜 고조선의 영토 문제가 중요한가
중학교와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는 고조선은 한민족이 세운 최초의 국가라고 서술되어 있다. 고조선의 나라 이름은 #조선(朝鮮) 이었다. 고조선에서는 통치자를 단군이라 불렀는데, 고조선의 첫 번째 단군(檀君)은 왕검(王儉)이었다. 따라서 한민족은 단군왕검을 건국시조(建國始祖) 또는 건국조(建國祖)라 부른다.
어느 언론 매체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 국민들 가운데 단군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과 인정하지 않은 사람의 비율이 거의 비슷하였고, 잘 모르겠다는 사람이 약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단군은 고조선의 통치자였기 때문에 고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었다면, 당연히 단군은 존재했어야 한다. 단군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거나 단군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은, 고조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거나 고조선에 대해 잘 모른다는 뜻이 된다.
이것이 한국 국민들의 고조선에 대한 인식 수준이다. 자신들의 조상이 첫 번째로 세운 나라인 고조선에 대해 그것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다니, 그러한 역사지식을 가지고 문화민족이 될 수 있겠으며, 민족정체성이 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겠는지 심히 걱정스럽다. 그렇게 된 데에는 역사학자들의 책임도 있다.
고조선은 오래된 나라여서 그것에 관한 기록이나 자료가 충분하게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고조선에 대해 학자에 따라 서로 견해를 달리하는 부분이 있으며, 그것들이 가끔 논쟁거리가 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을 그 실체가 불확실한 나라로 잘못 인식하고 있다.
특히 국사개설서나 국사교과서에는 고조선에 위만조선과 한사군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단군조선에 대해서는 매우 간략하게 서술한 반면 위만조선에 관해서는 비교적 충실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조선이라고 하면, 위만조선이 중심이 되는 것으로 오해하게 된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지만, 고조선(단군조선)은 한민족이 세운 나라이고 위만조선은 중국의 망명객인 위만이 세운 나라이다. 통치자의 민족 성격이 다르다.
한국사개설서와 국사교과서에는 위만조선이 고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은 위만조선은 고조선의 서부 변경 즉 중국과의 국경 지역에 있었던 나라로 #한국역사 에 편입될 수 없는 것이다.
역사가 긴 나라의 고대사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견해의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 존재까지 부인되는 것은 아니다. 중국 상(商)나라의 경우, 그 당시 사람들이 남긴 기록인 #갑골문 (甲骨文)이 출토됨으로써 그 나라의 존재는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되었지만, 건국 연대나 멸망 연대 그리고 그 영역 등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조선에 대해 부분적으로 의문점이 있다고 하여, 그것이 고조선의 존재를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고조선에 대한 논쟁 가운데 중요한 것은, 고조선의 위치와 영토, 건국 연대와 붕괴 연대, 사회와 문화 수준, 고대사의 체계 등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특별히 영토문제를 주제로 삼은 것은 그것이 고조선 자체뿐만 아니라 그 후의 한국 역사를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막연히 부여나 고구려·발해 등이 한국 역사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생각은 다르다. 이 나라들은 한국의 역사에 포함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중국 역사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 나라들이 있었던 만주는 지금 중국 영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말한다. 그 나라들이 있었던 만주를 한민족이 통치한 적이 있느냐고….
지난날 고조선에 대한 연구가 충분하지 못했던 시기에, 한국인 학자들은 고조선을 지금의 대동강 유역에 있었던 작은 나라로 보았다. 지금도 고조선의 영토를 #청천강 이남의 #대동강 유역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다. 그렇다면 한민족은 만주를 지배한 적이 없다.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한 신라는 대동강을 북쪽의 경계로 하였을 뿐이고 그 뒤를 이은 고려나 #근세조선 도 만주를 지배한 적은 없다. 그렇다면 만주의 거주민들을 한민족이라 할 수 있으며 그 나라들을 한국 역사에 포함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부여나 고구려·발해 등을 중국 역사에 포함하려는 중국인들의 주장은 설득력을 갖게 한다.
4. 만주 지역 역사 연구에
눈을 돌려야 한다
고조선의 위치와 영토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면서, 일부 학자들은 고조선이 만주나 요동 지역에 있었으며, 그 남쪽 경계가 압록강이나 청천강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사실이 그렇다면 부여·고구려·발해뿐만 아니라 고조선까지도 한국의 역사에 포함될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만주는 한국 땅이었던 때가 없기 때문이다.
위의 견해들이 옳다면 한국의 역사는 한반도에 있었던 나라 중심으로 서술되어야 한다. 지난날 일부 학자들이 한국 역사의 정통성은 고조선이 아니라 삼한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이러한 주장은 바로 위와 같은 고조선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만일 고조선이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을 통치했다면, 당시에 이 지역에 살았던 모든 사람은 고조선의 국민으로서 하나의 정치공동체와 문화공동체를 이루어 한민족을 형성했을 것이므로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이 한민족의 활동무대가 된다.
그리고 고조선의 뒤를 이을 부여와 고구려 그리고 발해 등은 당연히 한국 역사에 포함되어야 한다. 즉, 한국 역사의 지리적 범위가 한반도뿐만 아니라 만주까지로 확대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료의 이용도 달라진다. 지난날 학자들은 대체로 한국의 고대문화를 한반도 중심으로만 이해하였다. 그러나 만주가 고조선의 영토에 포함되어 있었다면, 만주의 고대 자료도 한반도의 자료와 똑같이 한국의 고대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자료로 다루어져야 한다.
특히 #고고학 자료의 경우 만주는 현재 중국의 영토가 되어 있고 그 지역의 유적은 중국인들이 발굴, 연구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중국의 것으로 생각하고 한국 고대사 연구의 관심 밖에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다. 만주에 있는 유적이나 유물에 대해서는 #고조선시대 뿐만 아니라 그 이전이나 이후 시대의 것에 대해서도 한국 역사와 연관하여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 문화가 기초가 되어 고조선이 출연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고조선의 위치와 영토에 관한 문제는 고조선 자체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한국 역사 전체의 체계와 관련된 문제이다. 그러므로 고조선의 영역을 밝히지 않고는 한국 역사의 연구가 한 걸음도 올바르게 나갈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고조선의 영토를 밝히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어떤 학자는 #역사지리 를 연구하는 문제는 국제학계에서는 이미 유행이 지났다고 말한다. 아직도 고조선의 영토나 국경을 논하고 있을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학문은 유행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다. 밝혀지지 않은 문제를 밝히거나 잘못 인식된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하는 것이다.
국제 학계에서 논의되는 것들은 그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의문이 풀리면 더 이상 연구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다른 문제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단순히 유행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국제학계는 서양학계가 중심이 되어 있는데, 그들이 역사지리를 별로 논하지 않는 것은 서양사의 경우 그 분야에 대해 이미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 더 이상 연구할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한국 역사 연구에서, 역사 연구의 기초 가운데 하나인 역사지리에 아직도 매달려 잇는 것은 한국 역사 연구가 그만큼 뒤쳐져 있다는 것을 말한다. 우선 영토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로 말마암아 여러 가지 문제가 파생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필자와 박선희 상명대학교 교수, 하문식 세종대학교 박물관장 등은 고조선 연구에서 우선 그 영토를 확인하는 작업이 시급하다고 생각하여 문헌 기록, 고고학 자료, 복식 자료 등 여러 측면에서 이를 검토하려고 하는 것이다.
#고대사♧[古代史]
#고조선연구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