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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구한 세 충신 밀우密友 유옥구劉屋句 유유紐由 .. 동천왕은 양위하고 자살...

koreanuri@hanmail.net 2013. 4. 17. 15:10

나라구한 세 충신 밀우密友 유옥구劉屋句 유유紐由 ..

동천왕은 양위하고 자살...

 

  역사는 지켜야 지켜 집니다.
우리 역사에서 밀우 유유 유옥구 같은 충신과 동천왕 같이 의기 있는 왕이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고구려 역사에서 나아가 우리 배달겨레의 역사를 지키는 길의 하나일 것입니다.

 


1800년이 다 된 역사를 들먹여서 무엇할라고...


고구려는 668년에 패망하였으니 고구려를 말한다는 것은 지금 부터 최소로 치더라도 1,400년이 넘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랜 고구려 역사를 말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요? 그렇지만 동양3국 고대사의 중심에는 고구려가 꼭 등장 합니다. 지나(CHINA,支那)는 말할 것도 없고 왜倭 까지도 자기들이 고구려 역사를 가장 잘 아는 양,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주장하고 기정사실화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이런 옆나라들의 극성을 이겨내려면 우리 배달겨레가 고구려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물론이려니 더욱 열심히 찾아서 많이 해야 할 것으로 생각 합니다.

 

역사에는 매국노도 있지만 애국자도 있게 마련 입니다.  고구려도 그렇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을 견훤의 포위공격으로 부터 구해낸 신숭겸의 이야기는 많이 전해져 있고 그 후손들이 개국공신임을 자랑합니다.

고구려에도 그렇게 왕을 구해낸 애국자가 있었습니다.

 

 

< 남경태 지음 "종횡무진 한국사" >


남경태 지음 "종횡무진 한국사" 이 책의 97쪽에 그 세 충신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이 남경태라는 분의 책을 읽으면서 여러가지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삼국사기 이후의 중세와 근세의 역사에 대한 비평이 좋았습니다. 여기에서 고구려의 세 충신에 대한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나는 지난번 여기에 "삼국시대 오吳나라의 손권.. 국서에 고구려 동천왕을 흉노황제 선우單于라고..."라는 글을 올렸는데 거기에 동천왕이 관구검에게 수도 환도성을 잃은 것을 거론 하면서 나라구한 충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으로 미룬다고 하였기에 오늘 이글을 씁니다.

 

* 삼국시대 오吳나라의 손권.. 국서에 고구려 동천왕을 흉노황제 선우單于라고...   http://il11.tistory.com/218

동천왕은 위나라 조조와 동맹을 맺고 연나라 공손연을 토벌한후 당연하게 연나라 땅의 일부를 쪼개어 받을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위나라는 연나라를 모두 차지하고 내어 놓지 않았습니다. 화가난 동천왕이 쳐들어 가자 위나라에서는 관구검을 파병하여 고구려를 쳤습니다. 이 전투에서 동천왕은 관구검을 얕잡아 보다가 환도성을 점령당하여 강원도 옥저땅까지 도망을 쳤습니다.


 위험에 처한 동천왕을 왕건을 구한 신숭겸처럼 구한 밀우(密友)라는 병사와 그 밀우를 구한 유옥구(劉屋句)가 삼국사기에 실려 있습니다.

 

* 네이버 지식백과 "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밀우ㆍ유유 "   http://me2.do/GVivuJO0


이 때 유유(紐由)는 거짓항복하여 적장을 살해하였습니다.
밀우와 유옥구는 왕을 구하였지만 유유紐由는 계략으로 적장을 살해하고 죽은 것입니다.
아래에 네이버 지식백과에 있는 유유가 장렬히 전사한 부분을  묘사한 내용을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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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사잇길로 이리저리 헤매다가 남옥저에 이르렀지만 위군은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왕은 계책이 다하고 형세도 꺾여 어쩔 줄을 몰랐다. 이때 동부 사람 유유가 나와 말했다.


“형세가 매우 위급하오나 그냥 죽을 수는 없습니다. 신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하나 있사온데,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나라 군사를 대접하는 척 하다가 틈을 보아 저들의 장수를 찔러 죽이고자 합니다. 만약 신의 계책이 이루어진다면 이때 왕께서 떨쳐 공격해 승부를 결판내소서.”


왕이 “좋다.”고 하였다. 유유가 위의 군중에 들어가서 거짓으로 항복하고 말했다.
“우리 임금이 대국에 죄를 짓고 도망하여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몸 둘 곳이 없습니다. 장차 귀국 진영 앞에 나와 항복하고 사구(司寇, 형벌을 맡은 관리)에게 목숨을 맡기려 하는데, 먼저 저를 보내 변변치 않은 음식으로 종군하는 이들에게 대접하게 했습니다.”


위의 장수가 이 말을 듣고 항복을 받아들이려 했다. 유유가 칼을 음식 그릇에 숨겼다가 앞으로 나가면서 칼을 뽑아 위장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으니, 위나라 군중이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王間行轉輾 至南沃沮 魏軍追不止 王計窮勢屈 不知所爲 東部人紐由進曰 勢甚危迫 不可徒死 臣有愚計 請以飮食 往犒魏軍 因伺隙 刺殺彼將 若臣計得成 則王可奮擊決勝 王曰 諾 紐由入魏軍 詐降曰 寡君獲罪於大國 逃至海濱 措躬無地矣 將以請降於陣前 歸死司寇 先遣小臣 致不腆之物 爲從者羞 魏將聞之 將受其降 紐由隱刀食器 進前拔刀 刺魏將胸 與之俱死 魏軍遂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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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을 보위하는 것과 나라를 지키는 것
춘추5패의 하나인 진문공晉文公 중이重耳가 유랑하던 때 무릎살을 베어 굶주림을 달래 주었다는 개자추(介子推)의 이야기가 한식날(寒食날)과 함께 잊히지 않고 있는데 위 세 충신의 이야기는 그보다 훨씬 극적입니다. 신숭겸은 왕건을 구하고 죽었고 유옥구(劉屋句)는 적장을 살해하고 죽었지만 그 무게에 있어서는 유옥구의 살신보국이 더 빛나 보입니다.


그 후 동천왕은 군을 정비하여 관구검을 물리친 뒤 환도하여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비석인 "동천왕 벽비(동천왕 양위교서 벽비 東川王 讓位敎書 壁碑)"를 세운 후 양위하고 자살하였습니다.

 

 

 

<  * 동천왕 벽비壁碑 - 벽에 걸 수 있도록 구멍이 뚫려있는 비석 http://il11.tistory.com/218 내용참고 >


수도가 함락되어 피난한 왕들은 많습니다. 고려 때도 거란과 몽골의 침입 때 왕들이 충주나 나주까지 피난하였고 조선시대 선조는 의주까지 몽진을 하였으며 인조는 수도 함락이 문제가 아니라 삼전도에서 적장에게 무릎까지 꿇었는데도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동천왕이 벽비를 세운 것은 후세의 왕들에게 경계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생각 되지만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살을 하였으니 위 세 충신의 보국정신에 못지 않은 의기라고 생각 합니다.

 

 

1800년이 다 된 역사를 들먹여서 무엇할라고...
6천년 전 우리 민족의 역사를 억지로 끌어다 자기들의 역사라고 입을 모아 떠드는 이웃나라 앞에서 유구무언, 무슨 할말이겠습니까?

 

삼국사기에 이렇게 역사적인 사실과 함께 인물이 이름까지 실리는 것은 퍽 이례적이고 드문 일인데 김부식이 고려 중기임에도 유교의 관점에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으나 이런 사실을 실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여러 문중의 족보들이 삼국초기 때 부터 조상을 거론하고 있으나 이렇게 엄연한 국충정의 충신을 선조로 한 집안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2천년도 안 된 역사마저 우리가 외면한다면 이웃나라의 침탈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광복이 되었으나 역사의 광복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백 번 옳게 느껴 집니다.   우리의 역사는 바로 잡아 지켜져야 합니다.

 

 

 

  역사는 지켜야 지켜 집니다.
우리 역사에서 밀우 유유 유옥구 같은 충신과 동천왕 같이 의기 있는 왕이 있음을 우리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고구려 역사에서 나아가 우리 배달겨레의 역사를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 합니다.

 


 

 

 



 



.밝 누 리.

[밝은 우리의 온 삶터]

-밝은 밝음이며, 온은 따뜻함(溫)이고 모두(全 온통)이며, 누리는 살아가는 세상이고 살아가는 역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