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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의 날(殉國先烈-)""이 있는 11월.. 친일파 위암 장지연을 생각 합니다.

koreanuri@hanmail.net 2012. 11. 26. 14:55

"순국선열의 날(殉國先烈-)""이 있는 11월.. 친일파 위암 장지연을 생각 합니다.
 

 

 

  6월 6일이 현충일이어서 순국선열을 그립니다.

그런데 11월 17일이 "순국선열의 날(殉國先烈-)"이라는 것은 별로 주목받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순국선열의 날(殉國先烈-)
          http://terms.naver.com/entry.nhn?cid=386&docId=1023296&mobile&categoryId=386
  국가 보훈처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 http://www.mpva.go.kr/narasarang/event_view.asp?id=7&ipp=9

 

  순국선열의 노래
 http://www.mpva.go.kr/narasarang/music.asp?MOVIE_URL=/heang/music/순국선열의노래.mp3&daqumovie=

 

    일본의 조선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맞서 국권 회복을 위해 항거하고 헌신한 독립운동 유공자들 가운데 일신(一身)과

  목숨을 잃은 순국선열(殉國先烈)의 숭고한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이들의 얼과 위훈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법정기념일. 매년 11월 17일이며 ‘각종기념일등에관한규정’에 따라 1997년 5월 9일에 국가기념일로 제정

  되었다.

 

 

  많은이들이 현충일은 알지만 '순국선열의 날'은 잘 모를 것으로 생각 됩니다.
지금 대선국면인데 후보들이 '순국선열의 날'과 관련하여 기념식에 참가하였다는 기사를 못본 것 같은데 11월 17일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날이기에, 이 날을 소홀히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친일과 같은 환경을 겪은 때가 또 있습니다.

몽골의 압제하에 지낸 고려후기가 바로 이 때 입니다.  그 때도 친몽파가 있었고, 그들은 애국자들을 짓밟으며 몽골에 붙어 나라를 팔아먹으며 호의호식하였고, 후일 공민왕의 개혁이 실패하여 이성계 일파가 역성혁명을 일으킬 때 얼른 붙어서 기득권을 지키며 백성을 괴롭힌 무리들입니다.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도 그 무리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태조의 5대조는 징키스칸 막내아들의 군벌 출신 입니다. 따라서 이성계의 가계(家係)가 친몽파라는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위화도 회군을 하고, 역성혁명을 하고, 형제간에 서로 죽이고, 사병혁파라 하여 랑도를 없애 버립니다.  랑도를 없앴으나 임진왜란 때 관군이 아닌 의군이 나라를 지켜낸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랑도 즉, 화랑을 없애버린 죄 하나만으로도 민족앞에 대죄인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왜정시대와 몽골압제시대 친일파와 친몽파가 비슷한 점이 참 많습니다.

그들은 새나라를 건설한다면서 기득권을 유지하고 결국은 애국하느라 무지랭이가 된 애국지사의 후손들과 헐벗은 백성들을 억누르고 아무 처벌도 받지 않은채 마치 자기들이 애국자인양 나라를 주물렀습니다.

 

  문제는 친몽파야 벌써 600년이 지난 이야기지만 친일파는 아직 이나라에 엄연하다는 사실 입니다.

그들은 아직도 우리 대한민국을 좀먹고 있고, 우리는 아직 그들을 제대로 치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치죄를 못하는 것은 그렇다하더라도 그들의 횡포와 압제를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아랫글은 내가 1993년 11월에 노변정담에 올린 글입니다.
위암 장지연, 단재 신채호, 백암 박은식 선생 등이 '자강주의(自强主義)'로 "大韓自强會"를 조직하였던 격동의 20세기초의 정신이 지금은 어떤습니까?

  '자강주의(自强主義)'의 뿌리가 몸을 키우고 가지를 길러, 오늘의 대한민국이 셰계앞에 웅비의 나래를 펼치고 웅자를 드러내어 21세기를 밝달민족(배달민족)의 시대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위암 장지연.

훌륭한 선인이 친일파가 되었고, 현재 친일파로 분류 되었습니다.  나는 친일파에 대한 치죄 차원에서 그가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자강주의로 자강론에 입각하여 ''을 결성하는 등 대단한 애국을 하였으나, 친일파가 되었으니 마땅히 친일파로서 지탄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11월이 끝나가는데 19년 전의 글이지만 지금 읽으면서 매년 11월 17일이 "순국선열의 날(殉國先烈-)"이란 것을 유념하려고 합니다.

 

 


 

 

   11월 마지막 날, 韋庵을 생각함.  << 93/11/30 >>

노변정담

11월 마지막 날, 韋庵을 생각함. 93/11/30 08:07
    11월의 마지막 날을 보내면서 이달의 인물 이었던  韋庵(위암) 張志淵
(장지연) 선생의 自强論(자강론)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

    문화부에서 이달의 인물을 매월 한분씩 선정하여 추모행사를 가져오고
있는것이 상당기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범국민 차원의 큰 행사가 되지 
못하고 있으며 TV나 RADIO, 신문등 언론기관 에서도 너무 소홀히 하는것 같
은 생각이 듭니다.  이달의 인물을 중심으로하여 훌륭한 선열의 얼을 기리
고 그 뜻을 받드는 내용의 무슨 특집 이라거나 칼럼 또는 대 국민 차원의
홍보 프로그램이 거의 없는것 같습니다. 

    사실 이달에는 APEC 정상회담 이라든가 성철 큰스님의 열반등 국내외에
굵직한 사건들이 많아서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더욱 문화부의 이달의 인물
선정 사업이 빛을 잃는것 같은 느낌 입니다.


    韋庵 張志淵

사람들은 張志淵하면 그의 명논설 <血淚滿紙 滔滔數千言:혈루만지 도도수천
언>만을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 이라고 하여 크게 운운 할뿐 선생
이 주도하셔서 이룬 自强主義(자강주의)가 수많은 이나라 애국지사들의 귀감
이 되어 후일 광복투쟁과 임시정부 수립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읍니다. 


    개혁에 대하여.
요사이 개혁바람이 朝野(조야)를 휩싸고 있고 국민들의 큰 지지를 받고 있으
나 사실 개혁이 현 문민 정부에 와서 갑자기 돌출되어 나타난것은 아닙니다.
    개혁과 수구는 역사의 수레바퀴의 큰 두축을 이루어 발전과 퇴영을 거듭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에서 가장 아쉬운 개혁과 수구의 다툼중에 하나
가 "稱帝建元論(칭제건원론)" 입니다.


    일차는 묘청의 稱帝建元論이었읍니다.
    이차는 바로 고종황제의 大韓帝國으로의 稱帝建元 입니다.


    묘청이 고려 인종때에 稱帝建元을 주장하였으니 약 800년의 세월을 격
하고서야 겨우 개혁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만일 조금더 일찍 稱帝建元論이
세력을 얻어 개혁에 성공 하였더라면 우리 민족의 위상이 많이 달라졌을 것
이며 오늘날 우리 민족의 웅혼을 세계만방에 크게 떨칠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稱帝建元論은 고려말 李成桂의 威化島(위화도)  회군과 역성 혁명의
 당위성을인정받기위해 명나라에 사대외교를 전개하게 됨으로 인하여 그 명
맥이 완전히 끊긴채 구한말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최영장군의 요동정벌은 당시  元(원)나라가 망하고 明(명)이 들어서던
대륙의 혼란한 정세하에서 우리 민족이 통일신라 이래 염원하던 우리의 고
토 만주를 회복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는데, 위화도 회군으로 인하여 이
를 놓치게 되었으며, 썩어빠진 사대주의자들이 수구적으로 기득권을 지키려
함으로 인하여 단군이래 화랑도 라든가 삼별초라든가 하며 수천년을 이어오
던 우리의 國仙道(국선도) 마저도 완전히 그 명맥이 끊기게 된것이지요.

    미당 서정주 시인은 최근 그의 글에서 `국선도는 신라의 고운 최치원의
말대로 유불선을 모두 아우른 우리 민족 고유 사상이다"고 하였는데 이 국
선도의 徒黨(도당)이  최영 장군을 중심으로 하여 개혁을 하려다가 위화도 
회군으로 좌절하고 이후 사대를 근간으로한 주자학 독재로 인하여 완전히 그
 흔적도 찾을수 없게 사라져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國仙道 徒黨의 稱帝建元論은 그후 구한말에 이르러서야 젊은 개혁론자
들의 自强主義에 의한 國權意識 고취로 겨우 이룰수 있었던 것으로, 만일 
고종이 국호를 大韓帝國으로 바꾸고 稱帝建元을 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 임
시정부 라든가 광복후 대한민국의 국체 수립의 정통성 수립에 당위성을 부
여할수 없었을 것이며, 오늘날 우리는 중국의 종속국의 위치에서 새롭게 우
리 국권의 적통을 수립하여야할 위치에 설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일반 민중의 정서는 대개 안정을 추구하게 마련이며 그만큼 개혁을 이
루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 역사를 보더라도 趙光祖(조광조)나 金玉均
(김옥균)의 실패 그리고 東學農民戰爭의 실패등 급진 개혁의 좌절을 많이 
볼수 있읍니다.

    최근 국제정세를 보더라도 천안문 광장의 유혈사태나 러시아의 옐친이
처한 입장, 모스크바 유혈사태등에서 급진 개혁의 어려움을 실감 할 수 있
읍니다.   급진 개혁을 두려워 하며 자신을 현 체제에 안주한 중산층으로
의식하고 급진 개혁에 등을 돌리는 민중의 심리는 예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으며 등소평이나 고르바쵸프 그리고 과거의 왜왕 메이지(明治)처럼 점진
개혁이 오히려 성공하기가쉬운 것이지요.


    의식개혁
 5공 시절에는 개혁이 "의식개혁"이란 말로 둔갑하여 예비군 훈련이나 민방
위 교육 또는 직장 단위별로 동원하여 교육을 하였는데 그 내용은
    1. 근로자의 급여 인상 요구는 인플레를 가져와 도움이 돼지 않는다.
    2. 사치와 낭비를 하지 말고 근검 절약하여 애국하자.
이런말로 사회 구조의 개혁이 아닌 국민 의식의 개조를 시도 하였는데 우리
는 이에 대하여 
    1. 의식구조 개혁은 위로 부터 이루어 져야 한다.
    2. 제도의 개혁을 우선하지 않은 국민 의식개혁운동은 실패한다.
는 뜻의 반론을 제기하며 연사와 장시간 거의 싸우듯 논쟁한바가 있읍니다.


    "自强主義"

대한제국 光武(광무).隆熙(융희) 연간의 韋庵 張志淵 丹齋 申采浩 白巖 朴殷
植등의 自强主義는 수천년 이어온 國仙道의 개혁정신과 청일전쟁 이래 청의
 개혁파 학자들의 논거에 의하여 일어난 것으로 근대적 富國强兵型 自强國家
의 國權意識이 대두하는 역사적 전환기의 사상적인 뿌리를 이루었으며, 왕조
사적으로는 쇠망기였으나 민족사적으로는 밑으로 부터의 개혁이 형성되는 힘
찬 역사적 격동의 원동력 이었던 것입니다.


    자강론의 원리는 다아윈의 진화론의 관점에서 생존경쟁의 세계에서 내
가 살수있는 길은 適者生存(적자생존)의 원리상 오직 自强하는 길밖에 없다
는 것으로, 구한말까지 지켜지던 선비적 명분질서가 붕괴되고 금수와 다름
없는 弱肉强食(약육강식)이 세계를 지배하는 서구적 관점을 도입하게 된 것
입니다.


    "大韓自强會"

韋庵 張志淵은 이 사조를 수용하여 1906년 대한자강회를 조직하고, 당시 한
국 민족주의 사상을 <自强主義>라 규정하고 부국강병형의 국가건설을 위한 
殖産(식산)과 교육을 목적으로 활동 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11월을 보내며 우리는 위암의 자강주의를 오늘에 살려 김영삼 대
통령이 국회에서 연설한대로 "세계로, 미래로" 나아가야 할 것 입니다.
 이번 국회 연설에서 김 대통령은 유난히 "民族雄飛(민족웅비)"라는 말을 많
이 사용 하면서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 기회를 얻기 어려울 것이라고 강조
하였는데 이런 뜻에서 구한말 애국지사 韋庵 선생의 뜻을 더욱 기립니다.

      "自强을 이룹시다.
       세계에 우뚝선 배달 겨레가 됩시다.
       민족 웅비의 나래를 활짝 펴고 21세기를 맞이 합시다."


                           .일    정.

 

 


 

 

 

 

 

 

 .밝 누 리.

 [밝은 우리의 온 삶터]

 -밝은 밝음이며, 온은 따뜻함(溫)이고 모두(全 온통)이며, 누리는 살아가는 세상이고 살아가는 역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