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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엄동설한(嚴冬雪寒)에 어디로 가라고? "

koreanuri@hanmail.net 2013. 3. 11. 14:37

 "이 엄동설한(嚴冬雪寒)에 어디로 가라고? "

 

  "이 엄동설한(嚴冬雪寒)에 어디로 가라고? "
  "자갈논 한 마지기 늘릴려 말고 목구멍 하나 줄여라"

 

1970년대 후반
나는 20대 중반이었는데 양계장을 하다가 여름에 4만여수에 이르던 닭을 모두 뉴캐슬이란 병으로 잃고 곤란에 처하였다. 닭의 약값 및 사료값 외상을 비롯하여 1,850만원(당시 내가 살던 도시에서 집 3~4채를 살 수 있던 금액)의 빚이 있는 상태에서 살아갈 길이 너무 막연하였다. 여섯식구인 우리 가족은 내가 어떻게든 식량을 한됫박 들고 들어가면 먹고 그렇지 않으면 굶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엎친데 덮치는 일이 일어났다.
양계장은 비닐하우스 안에서 주거를 하게 마련이다. 그러니 우리 여섯식구도 비닐하우스 안에 기거하고 있었다. 여름에 양계장을 잃고 몇 개월이 지나 겨울을 맞을 때까지 아직 이사갈 집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그날도 하루 끓일 식량을 들고 돌아오니 비닐하우스가 몽땅 불에 타버리고 아무 것도 없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군대 제대할 때까지 가지고 있던 모든 소중한 것들이 모두 불에 타 사라져 버렸다.

이 화재는 나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버린 큰 사건이었다.

어머니가 동내의를 빨아서 빨리 마르라고 연탄화덕에 느려뜨려 놓았는데 거기에서 발화되어 불이난 것이다. 어머니는 물건을 건져내려다가 머리를 다 태워 형편없는 꼴이 되어 계셨고 60세를 바라보던 아버님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되어 계셨다.

양계장은 대도시 인근에 자리하고 있었다.
엄동설한에 갈 곳이 없게 된 우리의 딱한 처지를 보고 이웃 사람들이 방을 마련하여 주었다. 자취생이 자취를 하다가 방학을 맞아 고향에 간 빈방이었다. 춥겠다면서 헌 이불을 가져다 주시는 분도 계시고 친인척 들도 당시로선 고급인 카시미롱 이불도 가져다 주시고, 그런데 그 방에 우리 여섯식구가 들기엔 너무 좁았다. 더우기 이불 몇채를 들여 놓으니 발뻗을 곳도 없었다.

당시 나는 시(詩) 평면기하학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는 내가 어렸을 때 읽었던 시인데 지금도 그 지은이를 모르고 있다.

                    밤마다 아내의 발을 안고잤다.

                    나는 이렇게 자고아내는 저렇게 누워서.

                    여섯자짜리 단간방에서

                    아홉식구가 뒹굴어야 하니

                    무엇보다 필요한것은 기하학이었다.

 

                    빈자리를 조금도 남기지않으려면

                    평면기하학을 익혀야 했다.

                    밤마다 아내의 발가락만 매만지며잤다.

        

               < 동아일보에서 찾은 불이 났을 때 자료가 타 지은이를 알 수 없는 평면기하학 >

                  * 평면 기하학 =  동아일보 1973.09.28    http://me2.do/GRjSth88

                     칼럼 제목은 입체기하학이지만 안에 든 시(詩)는 평면기하학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난 그 방에서 잘 수가 없었다. 나를 제외한 다섯식구은 그 방에서 자도록하고 나는 저녁이면 이곳 저곳 아는사람 집을 기웃거리며 잠잘곳을 찾았다. 하루라도 일을 안하면 온식구가 굶어야하니 그런 상태에서도 일품을 팔러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개학이 다가오자 문제가 생겼다.
학생이 돌아올테니 방을 비어 줘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갈 곳이 없다. 물론 돈도 없다. 양계장하다가 망했다는 것을 다 아는 처지에 단 몇푼 돈을 돌릴 곳도 없다. 방학이 끝난다지만 01월말이니 아직 엄동설한이어서 어디가서 초막을 칠 수도 없다. 허~

할 수 없이 가장 가까운 친척집을 찾았다.
시내에 사는 나의 혈육가운데 가장 가까운 혈친인 그 집은 빈방이 한 칸 있었다. 그 방은 여름에 농사를 지어 나락을 섬가마니로 쟁여놓고 간혹 한두어 가마니씩 사서 가용을 하는 용도로 쓰이고 있었다. 그 방을 쓰자고 했더니 승락하신다. 이사갈 준비를 하였다. 아무 물건도 없지만 그래도 챙길것은 있게 마련이다.

이제 이사를 가면 된다.
내일 이사를 가려고 오늘 찾아 뵈었다. 그런데 이 무슨 말씀인가? 이사를 오지 말라는 것이다. 아무리 애원해도 막무가내 완강하게 이사오지 말라는 것이다.


 "이 엄동설한(嚴冬雪寒)에 어디로 가라고? "

어떻게 할 것인가?
변두리의 공동묘지나 시내 다리밑을 기웃거리고 다녔다고 하면 거짓말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겠지.
참말이다. 난 여섯식구 갈 곳이 없게 되자 아무곳이고 바람 막을 곳을 찾아 다녔다.
그런데 뜻하지 아니한 일이 생겼다.
어느 친척께서 돈을 가지고 오셔서 방 한 칸을 얻어 주셨다
그 방이라고 하여 넓고 넉넉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평면기하학이 필요하고, 난 이리저리 얻어잠을 하고 다녔다.

세월이 흐르고 이사오지 못하게 한 가장 가까운 친척의 뜻이 헤아려졌다.

  "자갈논 한 마지기 늘릴려 말고 목구멍 하나 줄여라"

난 이런 속담을 알고 있다. 아버지께 늘 들었던 것 같은데 이 말이 다른사람들도 사용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당시 날 이사오지 못하게 한 그분은 우리 식구가 굶는 것을 염려하신 것이다. 당신 쌀밥 자실 때 보리밥이라도 보리밥 자실 때 죽이라도 죽 끓여 자실 때 피죽이라도 끓여 먹으면 다행이지만 만약 굶으면 먹여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 일이 있은 후 10년 쯤 후에 그 분이 돌아가실 때 까지도 난 유감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후 그 분의 심정을 헤아리게 되고 이해하게 된 것이다.

가난을 물림하며 살아온 우리 민초들의 속사정이 이렇다.


난 지금도 그 때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쓰리다.
세 동생과 양친이 내 눈치를 보면서 굶주리고 추위에 떨던 모습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 진다.
이런 글이 쓰고 읽을 가치가 있을까?
그러나 난 나의 지난날의 일을 지금 이렇게 고백하는 심정으로 쓰고 있다.


 

 

 

 

 

.밝 누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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