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향민(無鄕民)
왜정시대(倭政時代 1910~1945)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살다가 왜(倭)의 패망(1945.08.15)과
함께 왜(倭)로 돌아간 사람들 가운데는 고향을 말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남북이
산가족은 비록 갈 수 없으나 고향이 확실히 있는데 왜정때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왜인(倭人)들
특히 부자 2대가 모두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의 경우는 더욱 무향민(無鄕民) 입니다.
한일 원로방(元老坊) 심포지움
93년 11월 서울 스위스 그랜드호텔에서 열린 행사 인데 다수의 무향민들이 현해탄을 건너와
참가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물론 원로방(元老坊)이 참가하고 왜(倭)에서는 옐로우 소사이어티 포럼이 참가한
회의 였습니다.
벌써 20년이 흐르다 보니 당시로는 세계에서 PC통신을 할 수 있는 몇 개 안되는 국가, 특히
동양에서는 유일한 두 국가의 원로들이 모여서 패널토의를 진행하였고, 이를 PC통신 게시판
에 생중계 하였던 것입니다.
원로방 노변정담(爐邊情談) 게시판에는 당시 우리나라와 왜국(倭國)의 패널들의 토론 내용이
있을 터인데 지금은 찾아 보기 어렵습니다.
지금 사후 대책위(파란 원로방 폐쇄 대책위)에서 KTH파란닷컴으로 부터 원로방 디지털 자산
을 받기 위해 대기상태이고, 비록 개인차원이지만 이미 원로방의 모든 데이터를 다운 받아 종
전의 원로방과 같은 사이트를 구성하고 있는 회원이 계시니 원로방 회원들의 의견만 모인다
면 다시 게시판에서 이런 디지털 자산을 인터넷을 하는 사람 누구라도 확인 할 수 있게 될 것
입니다.
원로방의 도암 김대수. 소석 강태원. 일운 김석찬 선생님 등은 모두 고인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원로방의 고문이신 김정흠 박사님의 근황은 살피지 않았으나 건승하시리라 생각 합니
다.
아랫글에 등장하는 왜인(倭人)이 행사가 끝난 후 원로방 회원집에 머무르다 돌아 갔는데...
길을 가다가 나무를 붙잡고 "많이 바뀌어 알아 볼만한 것이 없었는데 어렸을때 있던 이 나무
가 이렇게 한아름이 되도록 자랐구나!!"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무향민의 참모습이라고 생각 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도 왜정시대 왜(倭)에서 태어나 돌아온 사람들 가운데 무향민이라 할
만한 앞선이(고령자)들이 계시리라 생각 합니다.
그러나 피해자인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해자인 왜인(倭人)들 보다 더 편하게 자기의 태생지를
방문할 수 있었을 터이지만, 가해자인 왜인(倭人)들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주저하는 마음에
자기가 태어난 대한민국 땅을 찾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와 왜(倭)의 교린관계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아래 글의 내용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여전한 양국의 관계가 답답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선린으로 가야할 이웃을 도외시하고 있을
수도 없으니 더욱 답답합니다.
선린 이웃
대한(大韓)과 왜(倭)가 이웃의 정의를 두텁게 하여야 할텐테. 요원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안
타깝습니다.
아랫글은 1993년 11월에 열린 한일원로방심포지움 당시 원로방(元老坊) 노변정담(爐邊情談)에 올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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