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4대 해전. '한산도 해전'.. 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의 전력은 세계 최강이었다...

 

 

  나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그렇기에 더욱 알고 싶은 것이 많다. 전문가가 아니기에 모르는 것이 많고 그렇기에 더욱 알고 싶은 것이다.

임진왜란의 해전 가운데 가장 큰 해전이라는 한산도 해전이 세계 4대 해전 가운데 하나라는 책을 몇 년 전에 읽게 되었다. 사실 천만 뜻밖이었다. 인터넷이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그러나 인터넷에서 찾아본 한산도 해전은 세계 4대 해전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지 않았다.
한산도해전이 처음엔 뜻밖이었고 다음엔 실망하였고 또 그 다음엔 놀랐고 마지막엔 확고한 믿음이 생겼다.

 

 

                                      < 윤지강 지음  느낌이 있는 책 펴냄  세계계 4대 해전 >


 

먼저 세계 4대 해전을 살펴보자


1. 살라미스 해전( BC 480년)

   지중해의 도시국가 그리스와 동방의 대제국 페르시아 사이의 전쟁

2. 칼레 해전(1588년)

    영국과 스페인 사이의 종교전쟁.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격파되어 이후 영국이 해상권 장악


3. 한산도 해전(1592년)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왜倭 수군을 대파한 전쟁


4. 트라팔가르 해전(1805년)

   영국 넬슨 제독과 프랑스 나팔레옹 연합군 사이의 해전으로 나팔레옹 세계제패 좌절

 

위의 책에도 인터넷을 찾아봐도 세계 4대 해전을 대부분 위의 4개의 해전을 들고 있다.
난 처음에 한산도 해전이 세계 4대 해전가운데  하나라 것을 뜻밖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름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다.


이후 더 알고 싶어서 참고 서류를 보고 인터넷을 계속 찾다 보니 한산도 해전을 세계 4대 해전에 넣는 것은 극우분자들의 주장에 불과하고 각 나라마다 자기나라의 입장에 따라 정의할 뿐 아니라 전쟁이 너무 많아 한산도 해전을 넣는 것은 무리라는 주장을 발견하고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심을 가지고 지내다 보니 다시 놀랄 일이 생겼다. 알고보니 한산도 해전 당시 조선 수군은 세계 최강이었고 준비된 해군이 승리할 수 밖에 없었으며 더하여 이순신이라는 유비무환의 명장이 승리를 이끌게 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일부의 주장과 같이 한산도 해전을 세계 4대 해전의 하나로 넣는 것은 극우분자의 주장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은 잘 못 된 것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놀란 것이다.


마지막으로 확고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역사에도 해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세계 최초로 함포를 배에 싣고 전쟁을 치른 나라가 우리나라이고 왜倭  보다 확고히 우세한 병력수와 화력으로 승리한 한산도 해전을 세계 4대 해전에서 제외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한산도 해전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고 훌륭한 전쟁임을 알게 되었다.


위에 든 4개 해전 가운데 살라미스 해전(BC 480년)은 기원전의 너무 오래된 해전이어서 믿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올림픽의 꽃인 마라톤을 탄생시킨 전쟁이 살라미스 해전과 같은 나라 사이의 전쟁이었다. 지중해 그리스의 도시국가들과 페르시아와의 전쟁인데 BC 480년의 살라미스 해전보다 10년이 빠른  BC 490년에 승전보를 전하려고 마라톤에서 아테네 까지 40Km를 달린 달린 것이 마라톤의 효시 라는 것으로 보아 사실인 것 같다.
  공자(孔子 BC 551 ~ BC 479)와 같은 시대인데 그리스도시국가연합이 370척 페르시아가 800척의 전함을 동원하였다니 대단하다.  공자를 봐서도 살라미스 해전을 봐서도 BC 6세기(BC 500 ~ BC 401)에 세계는 이미 흥성하고 있었는데 우리나라는 역사시대에 접어들지 않았다는 일부 강단사학자들을 이상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우리나라 수군과 해전의 역사를 살펴보자
이미 말하였지만 난 역사학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 글을 학술적으로 분석하거나 사용하지 말기 바란다. 특히 학생들은 이 글의 내용을 공부의 재료로 삼아서는 안 될 것임을 밝혀 둔다. 한가지 더 이 글은 기억을 모아 쓰는 글이어서 여러 참고서적을 참고하였으나 한계가 있음도 아울러 밝혀 둔다.

 

1. 고구려 고건무 제독과 수나라 래호아의 해전(612년)

 

    "살수대첩"에서 고구려 고건무 제독과 수나라 래호아의 평양 해전.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수군은 살수대첩(612년)에서 고구려 고연무(후일 영류왕) 수군 제독이 수나라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수나라의 래호아가 끌고온 4만에 이르는 수군을 격파한 것이다. 고건무 제독이 래호아의 수군을 격파하지 못했다면 을지문덕 장군이 명장이라지만 살수대첩을 승리로 이끌지 못하였을 수 있다.


  그 이전에도 광개토대제(374 ~ 412) 가 백제를 치면서 수만의 수군을 동원하였고, 수차례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치면서 수군을 동원하자 고구려 역시 수군으로 대응하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소상하지 않아 고연무 제독을 제일 먼저 든다.


  고연무는 후일 영양왕에 이어 영류왕이 되어 당나라와 화친정책을 펼치다 전쟁불사파인 연개소문에 의해 시해된다. MBC에서 '칼과 꽃'이라는 사극을 보면 영류왕과 연개소문의 대결을 알 수 있다.

 

 

2. 백제부흥군과 나당연합군의 백강전투(663년)

 

   왜倭에서 온 부여풍이 병선 4백여척과 약 4만의 군대로 백제부흥군과 연합하여 나당연합군과 벌린 전투


660년 백제가 멸망한 후 백제 부흥군과 왜倭의 구원병이 합세하여 나당연합군과 벌였던 전투.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옹립하고 백강에서 싸웠으나 나당연합군은 왜선 4백여 척을 불태우는 등 크게 이겼다. 이는 백제부흥군의 입장에서는 패배이지만 신라 입장에서는 비록 당나라와 연합하였지만 400여척에 이르는 왜의 병선을 무찌를 쾌거가 되는 것이다.


지금부터 1400년쯤 전에 이미 우리나라는 왜와 해전을 치러 400여척의 왜의 병선을 무찌르고 승리한 것이다.

 

 

3. 해상왕 장보고의 동아지중해 해적 토벌과 해상권 장악(828~846)

 

   청해진대사 장보고(?~846)는 왜구 등의 해적을 소탕하고 해상왕이 되어 동아지중해(*)를 장악하였다.


고연무 제독이 해전을 치른 이후, 또 백강전투를 치른 이후 약 200년 내외가 지났을 즈음 신라 제42대 흥덕왕 3년(828) 4월에 청해진대사(淸海:莞島. 淸海鎭大使)가 된 장보고는 왜구를 철저히 토벌하였다. 

당나라와 명나라는 왜구의 침략을 많이 받은 나라들이다. 당나라와 같은 시기의 신라와 명나라와 같은 시기의 조선도 당연히 왜구의 침략을 많이 받았다.  신라의 청해진대사 장보고가 이 해적들을 소탕하여 동아지중해의 해상교역권을 장악하였다는 말은 해전을 치러 승리했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고려말과 조선시대에는 대마도 정벌과 화약을 발명한 후 개발한 화포와 함포로 왜구를 제압하였다.


장보고의 휘하에 있었던 것으로 예상되는 작제건의 아들이 왕륭(본명 용륭)이고 왕륭의 아들이 왕건이다.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에 웅거하여 왕건의 고려창업의 배후가 되는 해상세력을 기르고 보존한 것은 실로 우연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고려는 해상세력이 세운 나라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개경이 번영한 것은 해상교역의 중심지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해전사를 말하면서 장보고의 해적 토벌과 해상권 장악을 뺄 수는 없다.

( * 동아지중해 : 좁게는 발해와 황해를 넓게는 황해 남해 동해를 더 넓게는류큐열도 일대까지를 아우르는 바다를 유럽의 지중해와 같이 보는 동국대 교수 윤명철 교수를 중심으로 한 역사학계의 이론 )

 

 

4. 궁예와 견훤의 금성전투에서의 해전(903년)

 

    금성錦城(현재의 나주羅州)을 귀부歸附 시킨 태봉국 궁예의 장수 왕건과 후백제 왕 견훤의 해전


장보고 이후 불과 60년이 지났을 즈음 궁예의 태봉국은 903년 왕건을 사령관으로 금성錦城(현 나주羅州)을 공략하여 귀부 시켰다. 왕건은 수상세력 작제건의 손자로서 금성전투에 예성강지역을 배경으로 한 수상세력을 활용하여 수군을 동원하였다. 경기도 지역의 태봉국이 견훤이 지키는 충청도 지역을 지나서 육로로 나주를 공략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수상세력이었던 왕건이 바닷길로 나주를 친 것이고 당연히 해전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금성태수는 나총례였다.  우리 해전사에 나총례는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왜? 고려시대 여몽연합군의 고려군 사령관 가운데 하나였던 회원대장군 나유가 그의 후손이며 또한 임진왜란 때 조선수군의 신무기였던 거북선을 창제한 나대용이 그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몇해 전 왕건이라는 사극을 보면 해전이 그려지긴 하였으나 금성태수 나총례와 나주 장자 오다련은 육전만 치르고 궁예의 태봉국에 귀부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극작가의 역사인식 잘못이다. 당시 금성錦城은 바다에 접한 도시였다. 여황현(*) 까지 바닷물이 들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을 만큼 바다를 접한 금성전투를 육상전투라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금성태수 나총례와 나주장자 오다련이 수하에 수달水獺이라는 수군 장수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것을 봐도 그렇다.
< * 여황현艅艎縣: 현재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량동. 광역시로 합병되기 전 광산군 본량면. 조선시대에는 나주의 속현이었으며 옛 지명인 여艅와 황艎에 모두 배주(舟) 들어 있는 것을 보더라도 바닷가였다는 주장이 있음. 그러나 옛 지명은 여황余皇이었다가 나중에 舟가 더하였다는 주장도 있음 >


  해상세력인 왕건이 역시 해상세력인 금성태수 나총례와 손을 잡기 쉬웠을 것이고 그렇기에 왕건은 큰 전투를 치르지 않고 금성을 귀부 시켰지만 견훤과의 해전 그리고 금성을 지키는 수군과의 해전에 승리하였기에 고려 건국의 기반이 되는 금성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해전의 네 번째를 금성전투의 해전으로 든다.

 

 

5. 여몽 연합군의 왜倭 원정

 

   충렬왕 즉위년(1274년)과 충렬왕 7년(1281년) 2차례에 걸쳐 원과 고려의 연합군 일본 정벌


고려는 해상왕국이고 해양세력이 세운 국가이다. 고려가 몽골의 지배하에 든 충렬왕 원년부터 벌써 왜倭를 정벌하였다. 충렬왕 7년의 2차 원정에는 충렬왕이 직접 진두지휘를 하였을 만큼 적극적이었다.  원나라가 수전을 잘하지 못하는 것은 자명하다. 고려라는 해상왕국이 없었다면 몽골이라고 하여 쉽사리 바다건너 왜倭를 정벌하려고 할 수 있었겠는가?  비록 두 차례 모두 뜻아니하게 태풍(신풍)을 만나 실패하였지만 여몽연합군의 두 차례에 걸친 왜倭 원정은 해상왕국인 고려의 수군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할 것이다.


  가. 첫 번째 여몽연합군의 왜倭 정벌(1274년)
       원군 2만 명에 고려군 8천 명의 병력에다 전함 9백 척 규모로 1274년 10월 6일 합포를 떠나 대마도(對馬島)를 공략하고 북구주(北九州 기타큐슈)에 이르렀으나 왜군 倭軍의 저항이 심하고 폭풍우로 전함이 좌초되고 많은 병사가 익사하자 귀환하였다.


  나. 두 번째 여몽연합군의 왜倭 정벌(1281년)
       원군 3만 명과 고려군 1만 명에 전함 9백 척의 규모로 합포에서 출정, 2차 원정 역시 작전의 실패와 또 다시 왜인倭人들이 가미카제(kamikaze 신풍神風)라 부르는 태풍을 만나 10만의 병력 손실과 함께 실패하였다.


그런에 이 두 차례 여몽연합군의 왜倭 원정에는 우리가 알아야할 우리나라 해전의 역사가 숨어있다.

하나는 전함이다. 몽골의 요구로 300여척의 전함을 고려가 건조하였는데 세계에서 최고最高이고 최고最古인 전함이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200년 이상 뒤의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할 때 사용한 선박과 비교해도 크게 안전하고 승선인원과 적재량이 당시 세계 최고여서 많은 병력과 무기적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배를 건조한 책임자가 나주출신 회원 대장군 나유이다. 나유는 왕건과 교전한 금성태수 나총례의 10세인데 선박건조 담당 부부사(部夫使)가 되어 나주와 전라도 등에서 공장(工匠)과 인부 3,500여 명을 모아 짧은 기간에 300여 척의 전함을 건조한 것도 당시로선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이렇게 건조한 전함이 태풍(카미가제 신풍神風)을 이기고 거의 대부분 생환한 것이다. 당시 몽골의 전함은 태반이 수몰하여 돌아오지 못하였다. 세계 최고最高 선박의 진가가 잘 나타난 것을 알 수 있다. 이 내용은 이종호 지음 "한국의 7대 불가사의"란 책에 실려 있고 내가 쓴 몇몇 글에도 그 내용이 있다.

 

 

6. 고려 우왕의 "진포 해전"(1380년)

 

    고려말 우왕(재위 1374~1388과 창왕(재위 1388~1389)의 왜구토벌 해전인 "진포 해전"이다.


   여몽연합군의 두 차례에 걸친 왜倭 원정으로 부터 100여년이 지났을 무렵 고려 해군은 또 다를 발전을 하고 있었다. 최무선이 화약을 발명하여 화포를 제작하여 함선에 함포를 장착하게 된 것이다. 최무선 장군이 화약과 화포를 만들려고 노력한 이유는 왜구를 물리쳐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고려말 40년 동안 약 500여회에 이르는 왜구의 침략이 있었다. 우왕 6년(1380) 8월 나세 · 심덕분 · 최무선 등의 고려 해군은 전선 100여척을 이끌고 왜구의 선박 500여척을 화포를 이용하여 불태운다. 이 "진포 해전"은 세계 해전사상 화약무기를 사용한 최초의 해전이다.  3년후 우왕 9년(1383) 정지 장군이 왜120여척을 남해의 관음포에서 화약무기를 활용하여 격퇴한다.


  1380년에 이미 세계 최초로 선박에 함포를 싣고 사격을 하였으니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처럼 세계 해전사에서 최초로 함포를 전함에 싣고 해전에서 함포사격을 한 최초의 전투가 고려의 "진포 해전"으로 고쳐져야 한다. 일부 외국의 역사학자들은 1410년 영국해군이 함포를 배에 실었다고 하는데 이는 잘 못인 것이다.

 

 

7. 여말선초의 세 번에 걸친 대마도 정벌(1389년 ~ 1419년)

 

   고려 창왕 1년(1389년), 조선 태조 5년(1396년), 세종 1년(1419년) 등 세 차례의 대마도 정벌


  가. 첫 번째 대마도 정벌
       고려 창왕 1년(1389년) 박위 장군은 병선 100여 척, 병력 1만여명 내외로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고질적인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이미 여말에 고려 수군이 대마도를 정벌한 것이다.


  나. 두 번째 대마도 정벌
       조선 태조 5년(1396년) 김사형(金士衡)이 오도 병마처치사(五道兵馬處置使)가 되어 2개월여에  걸쳐 대마도 섬을 정벌하였다.


  다. 세 번째 대마도 정벌
      세종 1년(1419년) 함선 227척, 병력 1만 7,258명, 식량 65일분을 준비하여 이종무(李從茂) 유정현(柳廷顯) 최윤덕(崔閏德) 등이 이끈 정벌이다.


세 차례의 대마도 정벌은 고려와 조선의 수군이 100여척 부터 227척의 선박을 동원하였고, 함포를 사용하여 수군의 전투력을 기르게 되어 조선 수군의 정예화의 게기가 되었다. 대마도 정벌은 강력한 수군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8. 삼포왜란과 연이은 왜변을 제압한 조선의 수군(1510~1555년)

 

   중중 5년(1510년)의 삼포왜란, 중종 39년(1544년) 사량진 왜변, 명종 10년(1,555년) 을묘왜변


   조선은 대형 화약무기의 개발을 계속하였고 삼포왜란에 이은 두 차례의 왜변은 해전에서 함포를 이용한 실전 노하우를 축적하게 하여 조선 수군이 정예화 되는 데 기여 하였다. 각 종 총통과 대장군전大將軍箭이 보편화 된 것이다. 조선 수군은 이런 대형 화포를 주조하기 위한 동철銅鐵이 모조라 절의 종을 거두어 총통을 제작하는 일까지 있었다.


조선 초기부터 임진왜란 사이의 조선 수군의 전력을 살펴보자.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군선은 829척이고 병력은 5만 402명이다. <<경국대전>에는 군선 739척과 병력 4만 8,800명으로 기록 되어 있다. 조선초기의 수군은 병력 5만명에 병선 700척 내지 800척을 보유하였으니 인구 5천만의 대한민국 수군 병력 못지 않은 전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 "세계 4대 해전"에서 거론한 임진왜란과 비슷한 시기의 칼레해전(1588)에 동원된 군사력을 보자. 칼레해전에 동원된 영국 함선은 197척이고 병력은 1만 5,000명이었으며 스페인 무적함대는 함선 130척에 병사 3만명이었다. 조선과 영국이나 스페인의 군사력을 수평비교 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조선의 수군의 막강함이 돋보인다.

 

 

9. 임진왜란과 한산도 해전(1592년)

 

   이순신 제독의 막강한 조선 수군은 임진왜란(1592~1598) 내내 왜倭와의 해전에서 승리하였다.


왜일까? 준비된 승리였던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 육군은 연전연패하였다. 왜倭의 조총앞에 무너진 것이다. 그러나 수군은 달랐다. 함포로 무장한 강력한 수군은 왜의 수군을 철저히 격파하였다.

조선 수군은 함포 사격술에 관한한 세계의 지존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준비된 조선 수군은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고의 전투력과 함께 이순신이라는 걸출한 장군이 있었으니 세계인들이 한산도 해전을 "세계 4대 해전"의 하나로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행주대첩 진주대첩 한산대첩
임진왜란의 3대첩을 보면 모두 유비무환의 승리였다. 조총의 위력은 근접전에서나 발휘할 수 있다. 천자 ·지자 ·현자 ·황자총통 등 화포로 무장한 조선군은 멀리서 접근하는 적을 화포 공격으로 무력화 시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상 우리나라 해전의 역사를 살펴 보았다.
우리나라 역사하면 바다는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더우기 해전에 대하여서는 거의 생각할 것이 없다.

기껏 임진왜란에서 왜군倭軍을 무찌른 노량 해전이나 한산도 해전이 떠오르긴 하지만 그 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세계 최초로 함포를 배에 싣고 해전을 한 나라이다.
  우리나라에 해전이 없었던 것도 아니요 해군력이 약한 것도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가장 막강한 전함과 함포를 가지고 있는 나라였던 것이다. 이런 우리나라의 해전사를 바로 알고 긍지를 가져야 하겠다.

 

내가 여기에 쓴 "과학의 날(04.21)과 물방개의 노래와 거북선... (2013.04.25 목요일)" 이란 글에

"우리나라의 선박건조술은 세계에서 최고最古이고 최고最高"라는 글을 올린 바 있다. 이 글에는 세계에서 제일 크고 강하고 병력을 많이 실을 수 있는 병선을 건조한 고려에 대하여 그리고 그런 배의 건조 책임자였던 회원대장군 나유羅裕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금성전투의 한 축인 금성태수 나총례의 10세가 여몽연합군의 고려 사령관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회원대장군 나유이다. 그리고 나유의 11세가 임진왜란시 이순신 장군의 막하에서 조선장造船將으로 실제 거북선을 창제한 나대용 장군이다. 그리고 나대용의 종제인 나치용은 돌격장(거북선 함장으로 추정)으로 이순신 장군과 함께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다.  우리나라 해전의 역사에 나총례와 나유에 이어 나대용으로 이어진 DNA는 우리가 잘 모르고 있어서 그렇지 큰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세계역사상 가장 뛰어난 해전 "한산도 해전"
우리역사에도 많은 해전이 있었고 뛰어난 지휘관과 무기와 전함이 있었음을 살펴 보았다.  세계역사에 등장하는 모든  해전 가운데 "한산도 해전"은 가장 뛰어난 해전이다.  어느 해전도 한산도 해전능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유비무환, 철저히 준비하여 이기는 전쟁이 빛나는 전쟁인 것이고 임진왜의 조선수군은 그런 전쟁을 치른 것이다.


우리의 것을 바로 알고 지켜야 한다.
"한산도 해전"도 그렇다. 왜 극우의 지나친 주장이라고 하는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이 유비무환으로 준비하고 있다고 통렬하가 적을 무찌른 전투, 이런 전투를 그렇게 평가해서 되겠는가? "한산도 해전"은 세계 4대 해전임은 물론이고 하나만 꼽는다면 세계 제일의 해전인 것이다.

 

                        < 2012년 과학의날(04.21) 국비로 소충사에 건립된 거북선을 창제한 나대용 장군 동상 >


= 참고 문헌 =
* 이종호 지음 "한국의 7대 불가사의" 역사의 아침 펴냄
* 윤지강 지음 "세계 4대 해전" 느낌이 있는 책 펴냄
* 임원빈 순천향대 이순신 연구소장. 전 해군사관학교 교수부장 "다시보는 리더십 이순신" 포스토 신문 연재기사

   - 조선 수군이 세계최강이었다는 부분과 관련된 자료는 임원빈 소장님의 글에서 발췌.
그 외 필자의 평소 지식과 인터넷 검색을 통하여 참고 자료를 수습하였음.

 

 

 

 

한산도 해전은 세계 제일의 해전임이 분명하다.
만약 세계 해전 가운데 하나만 꼽으라면 당연히 한산도 해전을 꼽아야 할 것이다. 전쟁은 유비무환이다. 약한
병력으로 큰 병력을 이겨낸 것이 자랑이긴 하지만 제대로 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임진왜란 당시 행주대첩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분명 약한 군사력으로 강한 적을 이겨 내었다. 그러나 이는 잘한 일일 수는 없다. 군비를 갖추어 적의 군사력을 압도하여 이기는 전쟁이어야 제대로 된 일이라 할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다가 쳐들어 오는 적을 우세한 군사력으로 무력화 시킨 한산도 해전은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해전이고 그렇기에 세계 앞에 자랑할 수 있고 자타가 그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혹자들이 세계에는 많고 많은 해전이 있는데 한산도 해전을 "세계 4대 해전"에 넣을 수 없다고 하는데 난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길 수 있는 전쟁을 하는 것이 제일이고 준비된 전쟁을 하여 이기는 것이 제일이라면 한산도 해전은 당연히 제일 뛰어난 전쟁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밝 누 리.

[밝은 우리의 온 삶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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