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세 늘려야 하는가 줄여야 하는가..

상속세 때문에 기업들이 문을 닫는다고?    

 

 

 

  상속세 때문에 기업이 문을 닫아야하고 중소기업 성장에 저해요인이 되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
이런 말은 망발 수준이다. 상속을 못하게 할 수는 없다. 그러면 누가 열심히 열하려고 하겠는가? 그렇다고 상
속세를 줄이라는 것은 단견이라도 너무 단견인 것이다.
나는 세금에 대하여 아는 게 없다. 그냥 귀동냥으로 여기저기서 얻어들은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그 상식은 이렇게 말한다. 상속세는 많을 수록 좋다.
재산을 자식에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환원하여야 한다. 이 것이 경제정의 이다.

 

 

                        < 2013년 우리나라 '1조원 클럽' 부자 28명 대부분이 상속증식으로 부자가 되었다 >

 


  지금 우리나라의 모든 기업들이 상속법을 지키면서 상속세를 내고 있을까?

물론 절대 탈세하지 않고 철저히 상속세나 증여세를 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절세 운운하면서 온갖 편법을 동원하여 2세들이 세금을 내지 않거나 적세낸채 기업을 물려 받고 있는 것 아닐까?  이건희의 아들 이재용이 상속세 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정몽구의 아들 정의선이 상속세 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아니 이건희와 정몽구가 어엿이 살아 있으니 상속세는 앞으로 그들이 세상을 뜬 뒤의 이야기이고 지금은 증여세라야 맞겠다. 이재용과 정의선이 증여세를 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하지만 내가 듣지 못해서 그렇지 그들은 분명 철저하게 증여세를 냈을 것이다.


이재용과 정의선 그들이 과연 증여세를 얼마나 냈을까?
증여세를 제대로 내고 지금과 같은 부자가 되었을까? 우리나라 주식부자 4위 정의선과 11위 이재용이 증여세를 제대로 내고도 어마어마하게 큰 돈을 가졌으니 빌게이츠나 저커버그 보다 더 훌륭한 사람들인데 왜 사람들이 그것을 간과할까?

 

1조 원 부자클럽?

도대체 조兆 원이라는 돈이 얼마나 큰 돈인지 난 감이 잡히지 않는다. 1조兆는 1억의 만배이다. 우와~ 1억의 만배.. 그 명단을 보니 부모로 부터 유산을 상속받아 증식한 이건희 정몽구 이재용 정의선 등이 멋지게 1~4위를 장식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글의 맨 아래에 있는 2013년 주식부자 순위를 보면 1위 이건희 · 2위 정몽구 · 3위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2조9829억 원 ·4위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사장 ·5위 최태원 SK그룹 회장 ·6위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7위 신동주 일본롯데 부사장 ·8위 정몽준 새누리당 전 대표 ·9위 이재현 CJ그룹 회장 ·9위 구본무 LG그룹회장 ·10위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11위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 1조2076억 원 순이다.  그들 가운데 자수성가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모두 거금을 상속 받은 사람들이다.


· 3위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2조9829억 원 ·11위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 1조2076억 원정의선과 이재용은 젊은 나이에도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은 다 버려 두고도 엄청난 부를 쌓고 있다. 물론 합법으로 재산을 모은 것일 것이다. 증여세도 한 푼 남김없이 다 냈을 것이다. 그렇지만 상식으로 이해가 되는가?  그들이 우리나라에서 어떤 커다란 업적을 올려 이런 부자가 되었는지 난 모른다.

( * 주식가액은 산정시점의 주가에 따라 차이가 있다. 위 자료는 2012.11.23 종가기준 한국경제신문의 자료이다. )


 

그런데 상속세가 많아서 줄여야 기업이 산다는 신문기사(* 아래 링크 참고)를 보았다.
망발이라도 한참 망발이 아닌가? 증여나 상속은 불로소득과 다를 것이 없다. 불로소득은 사기 강도 절도 뇌물 사재기 투기와 같은 데만 있는 게 아니다.  증여나 상속도 불로소득이고 그렇다면 도둑질 강도질과 별로 다를 게 없는 것이다.

 

 

1970년대 초 고등학교에 다닐 때이다.
학교 강당에 전교생이 모였다. 외국에 나가 큰 인물이 된 어떤 선배가 학교를 방문하였는데 후배들에게 좋을 이야기를 하여 준다는 것이다. 그 때 들은 이야기 가운데 기억에 남은 이야기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자동차에 대한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상속에 대한 이야기이다.


먼저 자동차. 1970년대 초 당시 지금은 잊었지만 우리나라 전체의 자동차 수가 200만대 정도라고 말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왜倭의 도쿄와 오사카에 이어 세번 째 도시인 나고야의 자동차가 700만대 미국 뉴욕의 자동차가 1,500만대라면서 우리나라와 경제력의 차이를 자동차 대수로 설명하였다. 이 이야기는 당시 선배가 한 말을 기억한 것이어서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자동차 댓수가 틀리다해도 당시 우리나라와 왜미倭美와의 국력차이를 말하는 것으로 지금도 그렇지만 엄청난 경제력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다음이 상속에 대한 이야기였다.
지금 생각하니 상속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왜倭와 미美의 상속에 대한 의식차이를 설명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듯 하다. 왜倭의 어떤 기업주가 죽자 그 아들이 상속세를 내야 하는데 돈이 없어 삼대를 살던 집 마저 팔게 되었다고 한다. 기업을 물려 받으려니 돈이 부족한 것이다. 그 기업은 창업주의 아들이 낼 상속세를 대납하여 주지 않았다고 한다. 기업을 포기하던가 집을 포기하던가 본인이 판단할 문제라고 이사회의에서 결정했다고 한다.  이 설명 끝에 그 선배는 미국이나 왜倭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재산을 자식들에게 상속 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상속보다는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서 간혹 상속세가 많다는 말이 오르내리더니 상속세를 내고는 기업을 제대로 상속받을 수 없으니 세법을 고쳐서 기업을 살려야 한다는 기사가 신문에 났다.(* 아래 링크한 신문기사 참고

안 된다.  젊은이는 부모가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같은 선에서 출발하도록 하여 줘야 한다.  정의선 이재용 처럼 뚜렷한 공적이 없으면서 젊은 나이에 부모를 잘 만나 1조 원, 2조 원의 돈을 가지게 되는 것을 보는 젊은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어느 젊은이가 우리사회를 공정하다고 하겠는가?

 

 

젊은이가 인생을 출발 할 때 공정하게 출발하도록 하여 줘야 한다.


그 것이 우리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로 가는 길이다.  젊은이는 부모가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잘나거나 못나거나, 배웠거나 못 배웠거나 부러움없이 어린시절을 보낸다. 그러나 사회 초년생이 되면 증여와 상속을 받을 수 없는 많은 젊은이들은 좋은 부모를 만나지 못해 힘이 든다는 것을 그 때야 알게 된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젊음이 있기에 오직 정열과 의지로 인생을 개척하여 나간다.
미국의 페이스북을 창업한 저커버그,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왜倭에서 소프트뱅크라는 큰 회사를 세운 손정의孫正義를 보라. 자수성가한 많은 기업인들이 부모로 부터 물려 받은 재산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인생을 개척하였다. 왜 그게 가능하였는가?  인생의 출발선이 공정하다는 룰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지금 젊은이들이 사회 초년생이 되어 인생을 출발할 때 공정한가? 그들이 인생을 함부로 하지 않도록 하려면 우리 사회가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가야 한다.  우리나라 50대 부자 가운데 창업기업인이 22%에 불과하다면 나머지 78%는 부모를 잘 만나 이어 받은 것이다. 반면에 왜倭는 68%가 창업기업인이라니 왜 이렇게 차이가 많이 나는가?
  위 '1조 원 클럽'에 들어 있는  우리나라의 개인재산 1조원이 넘는 부자 28명 가운데 6명만이 자수성가했고 나머니는 상속증식으로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


이러고도 우리나라가 상속세 때문에 기업이 문을 닫을 판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알게 모르게 상속증식으로 부를 이어 받으면서 상속세를 줄여야 한다고 외치는 자들에 부화뇌동하여야 하겠는가? 우민 정책(愚民政策). 백성들을 무식하게 만들어 놓고 편하게 통치하려던 자들의 시대가 다시 와야 하는가? 알아야야 한다. 이런 선동에 동조하는 것은 우민 정책(愚民政策)를 펼친 중세로 돌아가는 것일 것이다.  여론을 선도야할 위치에 선 모든이들이 이를 깨달아야 한다.


부자의 자식들이 부모의 고생한 댓가를 받아 편히 살아야 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가 공정하면 부를 거져 이어받지 않는다. 대부분의 부를 사회에 환원하고 공정하게 출발하고도 얼마든지 자기의 기량을 펴고 훌륭하게 인생을 살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자수성가한 기업인이 많아 질

수 있는 것이다.

 

상속과 증여세를 늘리자.
그리고 엄정하게 집행하자.

우리 모두가 감시자가 되어 편법 불법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자식에게 부를 전하여 불공정한 사회가 되는 것을 막아내자.

 


< ** 아래에 이 글을 쓰면서 참고한 신문기사를 링크하였음 ** >


* 주식부자 이건희·정몽구·정의선 순 <==   http://me2.do/5mSx5MSl

 

* [야! 한국사회] 부의 혈연선택 / 김우재 <==   http://me2.do/G4gvVixN
   재벌닷컴에 따르면, 개인 재산 1조원이 넘는 한국의 부자는 28명이라고 한다. 이들 중 6명만이 자수성가했고 나머지는 상속증식으로 부를 축적했다. 미국 최고의 부자들 대부분이 자수성가형인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 한국 50대 부자중 창업기업인 22% 불과…일본은 68% <==   http://me2.do/FaLF604H

 

* "상속세 납부 때문에 문 닫을 판"…기업들 울상 <==   http://me2.do/5HTXRg27
   불합리한 상속 제도가 중소기업 성장에 저해요인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국세무학회는 14일 업력 10년 이상, 자산규모 5억~1조원인 제조업체 172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86.1%가 '상속·증여세 부담'을 가장 큰 애로사항으로 꼽고 있다고 밝혔다. 과도한 상속세 부담으로 '폐업·도산'이나 '사업축소'가 우려된다는 답변을 한 회사도 56.0%나 됐다.


 

                    < 이건희를 시작으로 우리나라 10대 주식부호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자수성가한 사람은 없다. >

 

 

 

  언론의 막중한 책임
책임이란 무엇인가? 맡아서 해야 할 임무나 의무이다.  언론이 함부로 상속세를 줄여서 기업을 살리자는 말을 하고 있다면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무책임한 일인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는 외국과 다르니 부모가 자식에게 어렵게 번 돈을 상속하여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할 수
는 있다. 그러나 공정해야 한다. 불로소득이 아닌 일해서 번 돈으로 인생을 출발하도록 해야 정의가 살아있는 사회인 것이다.
  맹盲, 세종대왕은 한글을 만들어 국민들의 눈을 뜨게 만들었다. 백성이 아는 게 두려운 사회를 지금도 바라는
가? 증여세와 상속세를 더욱 많이 내도록 하고 엄정히 집행하여야 한다.  언론은 이 것을 국민들이 알도록 선도하는 입장에 서야한다.

 


 

 

 

 

 

 

 

 

 



.밝 누 리.

[밝은 우리의 온 삶터]

-밝은 밝음이며, 온은 따뜻함(溫)이고 모두(全 온통)이며, 누리는 살아가는 세상이고 살아가는 역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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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석이조 백내장 수술.. 특수렌즈 삽입하면 노안ㆍ난시까지 해결...

 

 

 

 눈. 인체의 모든 장기가 그렇고 눈에도 병이 많지만 나이가 들면서 오는 노안은 불편하기 이를데 없다.
그러나 노안은 질병이라기 보다 노화와 함께 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편하지만
 돋보기를 끼고 생활한다. 나도 지금 노안으로 돋보기 안경을 끼지 않고는 책은 고사하고 컴퓨터 화면을보는 것도 크게 불편하다.
  하지만 노화가 원인으로 발생하는 눈의 질병인 백내장이 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백내장은 수술을 하지 않으면 실명한다. 노안을 교정하기 위해 정상안을 수술하는 것은 고려하여야 할 일
이지만 백내장이 와서 수술을 하여야 한다면 꼭 노안교정을 함께 하는 것이 좋다.

백내장 수술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안과에 가서 진찰받고 수술하면 그만이지 일반인이 그런 것까지 알아서 엇 하느냐고? 마침 백내장 수술을 명쾌하게 설명한 웹진을 받았기에 여기에 노안과 백내장을 동시에 치료하는 일석이조 백내장 수술방법을 소개한다.    아울러 일반인으로서는 알기 어려운 녹내장을 알기쉽게 설명한 내용 소개한다.


나는 지난 2013.01.31 여기에 "노안.. 수술로 해결?? 특수렌즈 삽입 평생 시력개선 효과..."라는 노안을 수술로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는 글을 올린바 있다. 수술이란 수정체를 교체하여 특수렌즈를 삽입하는 는 것 말한다. 하지만 노안이지만 정상안인 사람이 그런 수술을 받기란 쉽지 않다. 마침 OO안과에서 웹진을 보내왔는데 백내장과 노안을 또 백내장과 난시를 동시에 해결하는 방법이 실려 있어 지난번 올린글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는 재료가 되기에 이 글을 쓴다.

 

사람따라 시간차가 있지만 노안은 나이와 함께 오니 누구라도 피해갈 수 없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노안은 오게 마련이다. 일단은 안경으로 교정할 수 밖에 없다. 이 글엔 난시도 함께 교정하는 방법이 소개 되었는데 난시는 나이와 관계 없이 사람을 평생 안경을 끼게 만드는 불편한 질병이다.


누구라도 백내장이 왔다면 당연히 수술을 받아야 한다. 웹진에 실린 수술 방법을 보니 백내장 수술을 하면서 특수렌즈를 삽입하여 노안까지 해결하고 난시가 있는 사람이라면 난시교정까지 함께하는 일석이조의 수술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 백내장 수술이 우리나라 국민이 가장 많이 받는 수술의 2위라니 놀랍다. >

- 아래는 위의 사진에 있는 글을 흐리게 보일 것을 우려하여 올렸으니 사진의 글을 제대로 읽었다면 건너 뛰어도 됩니다 -

 

백내장 수술은 우리나라 국민이 가장 많이 받는 수술 2위를 기록하고 있는바와 같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수술입니다. 노화가 주된 원인이다 보니 50~60대 이상에서 많이 받게 되는데요, 백내장 수술을 할 때 사용하는 인공렌즈를 특수렌즈로 삽입하면 백내장의 치료와 동시에 노안이나 난시를 효과적으로 교정할 수 있습니다.


백내장 수술은 백내장으로 혼탁된 수정체를 제거 한 후, 그 자리에 수정체 역할을 대신하는 인공렌즈를 삽입하게 됩니다. 이 때 노안교정용 특수렌즈를 삽입하면 백내장과 노안을, 난시교정용 특수렌즈를 삽입하면 백내장과 난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습니다.

                                                        ( 이상. OO안과에서 보내온 웹진에서 원용하였음. 사진의 글을 여기에 옮김 )

 

수정체에 구멍을 내어 빨대로 빨아낸다는 말이 학술용어일까? 의료용어일까? 그렇게 수정체를 빨아낸 자리에 2~3mm의 작은 구멍으로 특수수정체를 끼워 넣을 수 있다고? 그동안 무수히 백내장에 대한 설명을 들었지만 이 설명을 들으니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겠다. 다른 사람들은 다 아는 것을 나만 이제야 아는 것인가?

  만약, 나에게 백내장이 와서 수술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인지 확연히 알았으니 특수수정체를 잘 골라서 여생을 노안 때문에 고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다음은 녹내장이다.

백내장과 녹내장은 일반인으로서는 어떻게 다른 것인지 구분하기 조차 쉽지 않다.

결막염, 안구건조증 등 여러 눈병 가운데  백내장, 녹내장이 무슨 질병이란 설명이나 글을 간혹 읽거나 듣지만 알송달송하다. 다른 사람들은 어쩐지 모르지만 난 그렇다. 마침 녹내장을 설명한 글이 도움이 되겠다.

 

                                     ( OO안과병원의 녹내장을 설명한 내용을 갈무리하였음)

- 아래는 위의 사진에 있는 글을 흐리게 보일 것을 우려하여 올렸으니 사진의 글을 제대로 읽었다면 건너 뛰어도 됩니다 -


녹내장은 눈에서 받아들인 시각정보를 뇌로 전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시신경 및 신경섬유층의 손상이 진행되어 시야 ( 보이는 범위 ) 가 점점 좁아지는 질환입니다 . 전세계적으로 백내장 , 당뇨성 망막증과 함께 실명의 큰 원인을 차지하며 , 예방할 수 있는 실명의 가장 큰 원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또한 , 빈도도 전 인구의 2% 정도로 가장 흔한 만성 성인 안과 질환 중의 하나입니다 .


안압의 상승이나 안혈류의 장애 등의 원인에 의하여 주로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으며 최근에는 유전적인 요인 등 다른 요인들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 참고로 , 안압이란 안구를 채우고 있는 방수라고 하는 액체의 압력을 말하는데 , 안구내에서는 항상 일정량의 방수가 생성되어 순환하고 있습니다 . 어떠한 원인에 의하여 방수 유출이나 이동 경로에 장애가 생기게 되면 안압이 증가되어 시신경 손상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 고안압 녹내장 ). 하지만 안압이 10-21mmHg 의 정상 범위인 경우에서도 시신경 주위의 혈류 장애 등에 의하여 녹내장이 발생할 수 있으며 동양인에서는 고안압 녹내장보다 훨씬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정상안압 녹내장 ).


녹내장의 무서운 점 중의 하나는 말기가 되어 시력을 상실하기 직전까지도 전혀 증상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조기 진단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존재 여부를 가려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 또한 진단 과정에 시야 검사계나 OCT 나 신경섬유층 촬영 카메라 등의 시신경 분석 장비 등의 정밀 분석 장비를 사용하여야 확진할 수 있으므로 녹내장 전문의가 있는 전문 녹내장 클리닉에서 진단을 받으셔야 합니다 . 
              ( 이상. OO안과에서 보내온 홈페이지에서 갈무리하였음. 위 사진에 있으나 잘 안볼일 경우가 있으므로 옮김 )

  = 위에 원용한 글은 큰 안과 병원에서 간략하게 백내장 수술과 녹내장을 일반인들이 알기 쉽게 설명한 글입니다 =

 

 

  위의 글을 읽고 녹내장에 대하여 어느정도 알게 되었다.

그동안 녹내장은 눈의 고혈압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혈압이 아니라 안구를 채우고 있는 방수라고 하는 액체의 압력 즉 안압이 높아져서 발생한다고 한다. 그런데 꼭 안압이 높아서만 녹내장이 생기는 것이 아니란다. 동양인은 정상안압 녹내장이 더 많다는 것이다.  또 녹내장은 시력을 잃을 때까지 전혀 증상이 없는 경우가 많다니 말 그대로 졸지에 봉사가 된다는 말 아닌가?

  난 꼭 1년에 한 번 안과에 가서 안저검사라는 것을 받는다. 눈에 무슨 약을 넣으면 동공이 커져 한동안 눈앞이 보이지 않는데 이 상태에서 의사가 눈동자의 안쪽을 살피는 것이다. 위 글을 보니 그렇게 보는 것이 시신경 및 신경섬유층을 보는 것인 것 같다. 올해는 안과에 검사를 받으러 가면 내가 매년 받는 검사가 백내장과 녹내장 까지 알 수 있는 검사인지 확인하여야 하겠다.  만약 알 수 없는 검사라면 별도검사를 받아서 갑자기 눈이 머는 불상사를 당하지 않아아 하겠다.

 


어려서 눈에피꽃이란 꽃이 있었다.
눈에피병이란 용어가 있을까? 어렸을 적에 눈의 흰자위가 충혈되어 빨개지는 병을 눈에피병으로 알았다. 간혹 보면 눈자위가 빨개져서 안대를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눈병도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봄이면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에 눈이 빨개지는 것도 이런 병일 것이다.

  왜정倭政때 왜놈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무궁화꽃을 좋아하거나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만든 말이 눈에피꽃이란다.  1960년대 어린시절에는 무궁화꽃이란 말보다 눈에피꽃이란 말이 더 친숙할 정도였으니 왜倭가 얼마나 치열하게 우리민족혼을 말살하려고 하였는지 알 수있다. 그 때는 정말 무궁화꽃의 꽃가루가 눈에 들어가면 눈에피병이 걸리는 것으로 알았었다.


 "몸이 천냥이면 눈은 구백냥이다."


이런 말을 보더라도 눈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요즘 피어나는 무궁화를 보면서 그리고 눈병을 생각하면서 떠오른 생각을 여기에 붙인 것이 잘못일까?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
일반인이 건강상식을 너무 알려고 찾아 다니면서 따르려고 하는 것은 좋지 않다. 이러다가 스스로 의사가 되어
진단하고 치료하는 사태로 까지 발전하는 사람을 왕왕 본다.  그래서 나는 정체 불명의 각종 건강정보를 멀리한다.  흔히 단방약이라고 하고, 민간처방이라고도 하는 것을 따르다가 건강을 해치는 경우가 너무 많다.

  눈이라 하여 다를 것은 없다. 무엇을 먹으면 눈이 좋아지고, 어떤 눈운동을 하면 눈이 피곤할 때 좋고, 이런 것들도 알아서 나쁠 것은 없지만 지나쳐서 좋을 일은 없다.  여기에 소개하는 백내장 수술과 녹내장이 어떤 병인가에 대한 설명도 꼭 알아둘 필요는 없겠다.  다만 우리나라의 큰 안과에서 웹진으로 보내오고 홈페이지에 게시하여 있는 내용이니 필요할 때, 혹시 백내장이나 녹내장이 발생하였을 때 찾아서 읽을 수 있으면 도움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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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야를 달려라. 여름 장맛비와 땡볕을 벗하며.. 광야를 달려라...

 

 

 

  장마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올 08.01에 비가 오면 46일의 장마이고 사상 제일 긴 장마라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예보를 보
08.02는 전국에 비가 오고, 08.03~05일도 중부지방에 비가 오는 곳이 있을 것이라고 하니 47일 48일하고 기록이 늘어나게 생겼다.
  장맛비가 이렇게 길어지면 한 철 벌어 일년을 사는 사람들에겐 고단한 일이 된다. 특히 해수욕장에서 장사를
는 사람들이 그렇다. 기상청의 예보가 틀려 장맛비가 그만 내렸으면 좋겠다.

 

 

휴가는 맘대로 갈 수 없다. 보통 한두 달 전에 휴가가는 날짜와 기간이 정해진다. 조직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정해진 휴가기간을 맘대로 바꿀 수 없다. 그러니 올해 7월말에 휴가를 잡은 사람들은 이미 장맛비 속에 휴가를 보냈을 것이다. 그나마 휴가를 8월초로 잡았거나 여건이 되어 8월초로 미룬 사람들은 비 예보에 가슴깨나 조이겠다.


여름휴가하면 누가 뭐래도 제일이 바닷가다.
다음이 계곡이다. 바닷가나 계곡은 여름이 아니라도 철따라 즐길 수 있지만 여름바다와 계곡은 피서와 휴가가 맞물리기에 대부분 사람들에게 특별한데 만약 이런 날씨가 연년히 되풀이 된다면 휴가 풍속이 바뀌게 될지도 모르겠다.

 

< 금호동이 부른 황야를 달려라가 실린 음반 >


 

가슴이 답답할 때 부르는 노래가 있다.
금호동이 부른 "황야를 달려라" 라는 노래이다. 나와 이 노래에는 얽힌 사연이 있다.
나는 지방도시의 변두리에서 국민학교 4학년때인 1964년에 시내로 이사를 하였다.

그 집엔 방이 세 개였는데 부모님은 그 방 가운데 하나를 세를 놓았다.  그 방에 여러 사람들이 세를 들어 살았다. 언제인가 어떤 고등학생이 들었는데 난 간혹 그 형의 방에 들어가 놀았다. 그 때 들은 노래가 금호동의 황야를 달려라 이다. 어려서 그 학생이 부르는 것을 들었을 뿐이지만 가사와 노래를 기억하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신통한데 가사의 황야를 힘차게 달리자는 부분이 마음에 들어서인 것 같다.


국민학생이었던 나는 그 고등학생을 따라 많이도 돌아 다녔다.
여름이면 방학을 한다. 방학을 하면 한여름 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며 산과 들을 뛰어 다니면서도 더운 줄을 몰랐다. 비록 시내라지만 옆에 커다란 대학교가 있었는데 그 학교에 들어가면 냇물이 있어 멱을 감을 수도 있었고, 등물을 할 곳도 있었고, 아주 맛있는 물을 먹을 곳도 있었다. 고향이 시골인 학생이 우리 집에서 자취를 하였을텐데 왜 여름방학이면 시골 집을 안 갔는지 모르겠다. 또 숲이 있어 나뭇그늘에서 햇살을 피할 수도 있었고, 거기에 놓인 평상이나 바윗돌 위에 앉아 동요 부터 유행가 까지 온갖 노래를 부르면서 밝은 달아래 놀기도 하였다.


그 때 고등학생인 그 형이 자주 부른 노래가 이 황야를 달려라이다.
냇물에 들어가 멱을 감고 숲그늘에 들어 노래를 부르는 그 형이 멋있고 그러니 노래를 따라 부르고 그래서 어느사이에 배운 노래가 지금도 마음이 답답할 때면 부르면 시원해 지는 노래가 된 것이다.  지금 흐르는 노래는 내가 부르는 것과 약간 분위기가 다르다.  원래 노래를 부른 가수가 맞겠지만 내가 오래도록 불러온 노래에 정감이 더 가는 것은 인지상정일 터.. 그러나 금호동의 이 노래를 듣고 있어도 가슴이 후련해 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황야를 달려라
                                                                          금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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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끝없이 맑은 하늘 밑에              2.    넓다란 벌판 달려가면
                    시원한 들바람 산바람이                  어깨를 가볍게 스치네 
                    눈부신 태양이 비쳐도                     바람이 힘차게 불어도
                    젊음이 가득한 가슴 피고                 언덕길 넘어서 달리네
                    나무 그늘에서 하모니카 불면          종달새도 합창을 하네
                    싱그런 풀냄새 풍기는                     넓다란 벌판 달려가는
                    젊음이 가득한 가슴 피고                 힘차게 황야를 달리자

 

 

  이 노래를 부르면 내게 다가오는 시詩가 있다. 이육사의 광야曠野이다.
노래가운데 황야라는 가사를 보면서 광야를 자연스럽데 떠올리는 것이다.  사실 우리 민족은 너른 벌판에서 말달리던 민족이 아니었던가? 비록 지금은 반도의 남쪽에 밀려와 있지만 우리 민족의 심연深淵에는 광야를 그리워함이 있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비록 노래와 시를 빌려서지만 광야를 달리는 꿈을 꾸지 않겠는가?

 

혜란강에서 말달리는 선구자나 광야를 건너 목마를 타고 오는 초인이나 우리 배달겨레의 가슴속 깊은 곳에는 광야가 숨을 쉬고 있는 것이다.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맥이 연연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부지런한 산맥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에도  차마 이 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 중략 ~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가슴이 울려오지 않는가?
우리민족이 말달리던 광야가 가슴에 다가오지 않는가? 이육사가 왜정倭政으로 부터 해방을 꿈꾸는 시詩

라고 배웠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난 황야를 달리고 광야를 휘달리고 다시 천고의 뒤에 목놓아 부르

는 내 심연을 채운 마음의 외침이 중요하다.

 


* 경향신문 금호동의 황야를 달려라 음반발매에 대한 기사 <== 클릭   http://me2.do/FFhFbXdn 

 

                                <1964년 04월 04일 금호동의 황야를 달려라가 실린 경향신문의 신문기사>

 

우리나라를 한반도라고 하는 것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배달반도 혹은 동북아반도라고 하면 좋겠다.

만주를 만주라고 하는 것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배달벌 혹은 동북아벌이라고 하였으면 좋겠다.

남북한이 사용하는 깃발을 한반도기라고 하는 것 보다 윷을 문양으로 하여 배달기라고 하였으면 좋겠다.

우리는 대륙민족이면서 아울러 해양민족임이니 동아지중해의 수역을 알류산 열도부터 황해에 이르도록 하면 좋겠다.

남북통일을 당연히 하여야 하지만 동아시아 지역을 유럽연합 같은 배달연합 혹은 동북아연합으로 통일을 이루면 좋겠다.

대륙을 달리고 바다를 달려 가슴에 담긴 그리움을 달래자.

 

 


'황야를 달려라' 1964년에 금호동이 불렀으니 제법 오래된 노래이다.
1964년 04월 04일의 경향신문 기사를 찾았다. 인터넷이 참 좋다.
이렇게 오래된, 50년이나 된 신문기사도 거뜬히 찾아 낼 수 있다.
비록 동요나 가곡이 아닌 유행가지만 내 기억에 오래남아 지금도 부를 수 있으니 장맛비를 보면서 부른다.
내 가슴을 채운 광야에 대한 열망으로 넓다란 벌판, 황야를 힘차게 달리는 것, 장맛비나 더위가 감히 범접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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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필화(革筆畵). 장터에서 글자에 꽃과 새를 그리던 가죽그림..

 

 

  그 모습 본 것이 벌써 오래이다.
장터나 사람이 모이는 곳의 길바닥에 앉아 무지개색의 글자를 쓰고 새와 꽃을 그리던 사람들 말이다.
난 혁필화가 없어졌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없어져서는 아까운 우리나라의 전통문화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되는 혁필화가 아직도 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혁필화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고, 배우는 사람이 있고, 생활에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 민화 효제문자도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 >


  효제문자도孝悌文字圖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 여덟 글자에 식물·동물 등 갖가지 사물 이용해 그림으로 형상화하여 글 모르는 아이·여자에 유교적 윤리 가르치는 수단이었다고 하는데 정말 그럴까? 난 그렇지만은 않을 것 같다. 순식간에 무지개 빛깔로 아름답게 그려지는 그림앞에 반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납작한 가죽에 여러 색갈의 물감을 묻혀 휙휙 종이에 대고 휘두르면 꽃이 피어나고 새가 나르고 어느틈에 글자가된다. 그 모습을 보면서 한동안 떠나지 못하고 참 재주도 좋다고 감탄하였었다. 지금도 어디선가 그렇게 길가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만약 있다면 난 한달음에 달려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


  장匠, 전통장인들이 살기 어려운 세상이다.
옹기장, 대목장, 단청장(丹靑匠), 참빗장, 이름도 모르는 온갖 장인들이 어려움 속에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난 1980년대 초에 창무극의 선구자인 공옥진 여사가 베스타에 소도구를 싣고 시골을 다니면서 공연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1인 창무극으로 곱사춤 병신춤을 개척하여 퍽 어렵게 예인의 의지를 이어가는 것을 보고 감탄하였었다.  지금 공옥진의 창무극이 이어지고 있을까?
 대부분의 장인들은 생업을 보장하여 주지 못하는 자기의 기술이 맥이 끊기는 것을 두려워 한다. 선비들이 돈을 몰라 청빈하다고 하였지만 예인, 장인, 쟁이들도 기술은 있으나 그것으로 돈을 만드는 기술은 없다.

 

  끊기는 것들이 많다.
며칠전 신문기사에 왕실 화각장(華角匠 쇠뿔그림가구)이 이젠 아들이 아니면 전승할 사람이 없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이렇게 없어지는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면서 마음이 아팟다.  아들은 무슨 죄인가? 그런데 울며 겨자먹기로 아들에게 가르친단다. 정부의 지원금은 전승보조비 160만원이 전부라니 너무하다. 국민소득 3만 불 4만 불을 꿈꾸며 복지국가를 논하면서 우리의 전통을 이어가는 것을 이토록 소홀히 해도 될까?


 * 왕실 애장품이던 '쇠뿔 그림'가구..."이젠 자식밖에 전승할 사람 없어요" <== 클릭   http://me2.do/Glp3fqBj

 

  그런데 행여나 했는데 세계일보에서 혁필화를 연재한 것을 발견하였다.
4회에 걸쳐 "효제문자도(孝悌文字圖) 이야기(1)"라는 제목으로 연재하였다. 또 네이버 검색에서 많은 혁
필화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우리의 옛 혁필화를 모아놓은 블로그를 발견하였고 이어서 혁필화를 즐기는 사람이 운영하는 블로그를 발견하였다. 아하~ 이렇게 혁필화가 맥이 끊기지 않고 이어가고 있구나.. 퍽 마음이 좋다.

 

 

  영화 서편제에 혁필쟁이가 등장하는 것으로 기억한다.

주인공 송화의 아버지 유봉의 친구가 장터에서 혁필화를 그리다가 친구와 걸죽하게 술을 마시면서 네

아들을 내게 달라 혁필을 배우면 굶어 죽진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유봉은 소리쟁이인데 혁필쟁이

친구에게 아들을 내어 놓겠는가?  자기를 이어갈 소리꾼을 만들려고 한다. 소리쟁이거나 그림쟁이거나

예인들이, 쟁이들이, 자기의 기예가 끊기지 않기를 바라는 것을 영화 서편제에서도 알 수 있다.

 

* 영화 서편제(유튜브 1시간 54분) 무료로 보기  <== 클릭.   http://youtu.be/Z-MOMTUcVEc
  (짧은 광고는 건너 뛸 수 있으나 거의 두 시간분량이니 시간 있을 때 보시기 바랍니다.)

 

사실 영화 서편제는 예인의 전승을 위한 노력을 그린 이야기다.

친딸이 아니지만 딸 송화에게 자기의 소리를 이어가게 하기 위하여 유봉은 행여 송화가 다른 마음을 먹을까 싶어 두 눈을 멀게 만든다. 역시 친아들이 아니지만 아들 동호가 소리의 재주가 없자 고수가 되도가르친다. 소리꾼 소리쟁이 소리장이인 유봉의 기예를 전하려는 노력은 눈물겹다. 지금 우리나라의 은 예인들은 자기의 기예가 맥이 끊길까봐 노심초사하면서도 어쩔 수 없어 전승받을 사람을 구하지 하는 경우가 많고, 이러다 그 예인이 죽고나면 그 기예는 끊기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끊겨버린 기예다시 살리기 위해 눈물겹도록 노력하는 사람도 있고, 기관이나 단체도 있으나 한 번 맥이 끊긴 기예되살리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야할 것이다.



 * 인터넷 검색 '혁필화 문자도' <== 클릭   http://me2.do/GvU33mzh
     - 찾아진 그림들을 클릭하면 세계일보의 혁필화 연재기사를 찾을 수 있다 -


 * 네이버 블로그 '벽없는 미술관' 민화 문자도 <== 클릭   http://me2.do/GjD55bmy
     - 개인이 블로그에 동서양의 많은 미술작품을 모아 놓았습니다. 전통 문자도도 많다 -


 *  블로그 야은혁필  <== 클릭   http://me2.do/FkeFJCqg

     - 혁필화가 야은. 가죽붓 그림글씨 혁필화 소개, 혁필교육, 체험, 행사, 작품 등 안내 -

 


  1970년대 말 진도에서 무명의 서예가를 만났다.
아직 20대 후반이었던 내가 서예작품을 보는 안목이 있었을까?  나는 그 무명의 서예가를 도회지로 모셨다. 이름은 없으나 내가 보기에 서예작품은 퍽 훌륭하였기에 그 서예가에게는 작품활동만 전념하라고 하고 내가 작품을 들고 나섰다.  작품으로 생활을 하려면 작품을 팔아야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OO서"이란 간판을 걸게 되었는데 그 서도원의 집기일체도 오직 작품으로 돈을 만들어 채워야 했다.


  그런데 30년이 훌쩍 넘은 지금 그 무명의 서예가는 아직도 서예가로 활동하고 있다. 국내 전시는 말할 것도 없고, 지나支那, 倭왜를 지나 동남아를 건너 북미주 남미주를 거쳐 유럽에서 까지 전시회를 열었다.  나라에서 조성한 조형물의 글을 그 서예가의 작품으로 조성하기도 하였다. 난 내가 그분을 도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인은 예인정신이 있고 예인 근성이 있다. 모든 장인들은 장인으로서 고집과 오기와 긍지와 근성이 있다.


 그 서예가는 충분히 성공할만한 근성이 있는 분이었던 것이다.  만약 그분이 자기의 고향 진도에서 머물렀다면 지금과 같은 활동을 펼치진 못하였으리라. 예인은 쟁이는 장인은 오직 작품에 전념하여야 한다. 내가 한 일은 그것이다. 일정기간 그분이 오직 작품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

 

                                < 혁필화 모임에서 그려진 여러 작품. 야은혁필 블로그에서 갈무리.. >


  혁필화는 끊기지 않겠다.
젊은이들이 혁필화 그리기에 참가하고 혁필화로 요즘 유행하는 게임의 주인공을 그려내기도 한다. 전통에 신사조를 입히는 것이 어디 지금 일어난 일인가?  요즘은 창조란 말에 가렸지만 개혁 혹은 혁신이란 말을 우리가 얼마나 많이 썼는가? 혁필화가 하필 전통대로 문자도만을 그릴 이유는 없다. 위 야은혁필 동호인들이 그린 혁필화를 보라. 얼마나 자유로운가? 게임의 주인공이나 다른 사물을 혁필로 그려서 나쁠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이 끊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장匠, 장인. 장이, 쟁이 들이 소리쟁이거나 그림쟁이거나 목수쟁이거나 긍지를 가지고 우리문화의 맥을 이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보릿고개가 언제적 얘기인데 욕심이라고?

 

  "목표는 높게, 계획은 세밀하게, 실천은 성실하게"

 

우리의 쟁이들은 지금까지 고생하면서 우리의 전통문화를 이어왔다. 이젠 우리의 쟁이들이, 장인들이, 예인들이, 좀 더 편하고 떳떳하게 전통문화를 이어가도록 하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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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煎. 이름도 다양한 부침개 지짐개..

왜 주식이 아닌 부식으로만 먹을까?

 

  전煎. 찬으로 먹어도, 간식으로 먹어도, 혹은 배고플 때면 밥 대신 먹어도 맛이 있다.
내가 요리 하지는 못하지만 자주 그리고 맛있게 먹는 것이 전이다. 우리 집에는 거의 매일 전이 끊기지 않는다. 전은 밀가루 반죽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재료를 넣어서 그럴 수 있는지 모르지만 반죽을 냉장고에 넣어 두고 필요할 때면 전을 부쳐 먹는다.  전은 부친다고 많이 말하지만 간혹은 지진다고 하기도 하는데 둘 다 맞는 말일까?  아무려면어떻겠는가? 지져 먹고, 부쳐 먹고, 간편하고 쉽게 요리하여 맛있게 먹을 수 있으니 아주 좋은 우리 음식인 것이다.

 

                    < 부추전 반죽.. 부추전, 애호박전, 김치전 등은 우리집에서 자주 부쳐 먹는 전이다. >


중학교 다닐 때의 일이다. 집 근처의 포장마차에서 생선튀김을 팔았다. 할아버지가 만들어 파는 생선튀김은 맛이 기가 막혔다. 용돈이 부족하여 맘대로 먹을 수 없는 것이 항상 안타까웠다. 덤으로 그 할아버지의 딸이 가끔 포장마차에 와서 도우미를 했는데 예쁜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도 포장마차에 가는 재미 가운데 하나였다.


난 그렇게 생선은 그냥 튀김으로만 먹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알고보니 생선으로도 얼마든지 전을 부쳐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빈대떡은 어떤가? 빈대떡도 전 같은데 왜 떡이라고 할까? "빈대떡 신사"라는 멋진 노래를 부를 때면 더 그런 생각을 한다. 빈대떡도 전처럼 부쳐 먹는 것 아닌가?  우륵문화재가 열리는 충주의 탄금대에서 빈대떡을 먹었을 때의 기억을 항시 간직하고 산다.


알고보니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튀김보다는 전을 많이 부쳐 먹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중학교 다닐 때 포장마차에서 먹던 생선튀김이 사실은 전이었던지도 모르겠다.  간혹 시장 같은데서 튀김집을 만나면 생선튀김을 묻지만 없다고 한다. 가시를 빼고 비늘을 다듬는 등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튀기지 않는다는 답변만 돌아올 뿐이다.

 

빈대떡이나 수수부꾸미 동그랑땡 등도 좀 다른 듯 싶지만 나로서는 전과 다르지 않다. 또 제사상에 주로 오르는 산적(散炙)도 그렇다. 빈대떡도 수수부꾸미도 반죽을 하여 부쳐내지 않는가? 적(炙)은 그냥 고기만을 쩌내기도 하지만 반죽을 입히기도 하니 다른 듯 같은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번에 위클리공감에서 "전 앞에서 전전긍긍?"이라는 글을 만났다.
역시 전문가는 다르다. 전에 대해서 짧은 글로 모든 이야기를 다 하여 놓은 듯하다. 그 글을 링크하였으니 독자들 쎄서 직접 읽어도 되겠지만 여기에 일부를 옮긴다.

 

* 위클리공감 "전 앞에서 전전긍긍?"(2013.05.13 no.208  58쪽) <== 클릭    http://me2.do/GXiC2xmb

   -전의 종류-
     전은 종류도 다양하다. 우선 생선 종류로 만드는 전에는 숭어·민어·대구·명태·도미·준치·가자미·병어·광어·뱅어·웅어·밴댕이·비웃·북어·잉어 등과 여러 생선의 이리까지 쓰였고 굴·조개·새우·낙지·오징어·게·해삼·패주 등의 해산물로도 만들었다. 육류로는 소의 살코기는 물론 도가니·등골·양·천엽·간·선지와 돼지고기·닭고기 등으로 전을 해먹었다.

 
채소류로는 호박·배추·목이버섯·석이버섯·표고버섯·고추·연근·가지·깻잎·더덕·양파와 참나물·고사리 등도 전의 재료가 되었고 심지어는 청포묵·비빔밥·두부·김치로도 전을 만들었다.

 
철 따라 피는 꽃으로도 전을 지졌는데 삼월삼짇날에는 진달래꽃으로 두견화전, 중양절에는 국화전을 해먹었고 장미꽃·봉선화·맨드라미 등도 원료로 썼다.

 
그 외에 다진 쇠고기와 두부에 갖은 양념을 해서 지져내는 육원전이 있는데 흔히 동그랑땡이라고 하는 것이다. 육원전을 돼지고기로 만들면 돈전(豚煎)이라고 했다. 양동구리는 양을 곱게 다진 후 녹말가루와 달걀을 섞어서 만든 전인데 요즘은 찾아보기 어렵다.

 
별난 전으로는 참새전유어도 있다. <시의전서>는 그 요리법을 “참새 털을 깨끗이 뽑아버리고 쇠고기를 넣어 곱게 다진다. 양념을 넣고 재워서 화전같이 얇게 만들어 가루를 약간 묻혀 달걀을 씌우고 지져 초장에 쓴다”고 했다.

 
파전도 전의 한 종류라 할 수 있겠는데 식품사학자 고(故) 이성우 교수는 “중국의 전처럼 옷을 입히는 것이 아니고 빈자떡처럼 밀가루를 연결제로 썼을 뿐이니, 엄밀한 뜻에서 우리나라의 전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 이상 위클리공감 "전 앞에서 전전긍긍?"(2013.05.13 no.208  58쪽)에서 인용)-

 

             < 간혹 가는 5일장에서 부쳐 파는 수수부꾸미는 한 장에 5천원이어서 좀 부담스럽지만 자주 먹는다. >


 세상에~
가지전 ·감자전 ·메밀전 ·애호박전 ·풋고추전 ·파전 ·부추전 ·김치전 ·완자전 ·양파전 ·연근전 ·표고전  ·게전 ·내장전 ·대합전 ·부아전 ·육전 ·처녑전 ·양전 ·간전 ·등골전 ·생선전 ·굴전 ·수수부꾸미 ·빈대떡 등 등 등... 우리가 먹는 거의 모든 음식 재료로 전을 부칠 수 있는가 보다.


생선과 조개류와 오징어 해삼 등의 해물류와 채소와 버섯과 묵과 밥과 두부 까지 전의 재료가 된다니.. 하기야 김치전은 집에서 가장 많이 먹는 전이다.  그리고 동그랑땡도 전의 한 종류이고 참새를 원료로 한 전도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옛부터 화전놀이란 말은 있었다. 그러나 나만 그럴까? 왜정시대倭政時代 각박한 세상을 넘어 오면서 잊었을까? 지금은 화전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 같다. 있는데 내가 모르는지 모르지만 내가 알기로는 없다. 그런데 꽃, 진달래꽃 국화 장미 봉선화 맨드라미 까지 전의 재료로 쓰인다니 놀라는 것을 지나 당황스럽기 까지 하다.

 

화전(花煎)을 먹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체면불구하고 앞치마를 두르고 전을 지지고 부쳐 볼까? 내가 아는 어느 서예가는 요리가 취미이다.  시간이 나면 요리를 한다. 난 그에게서 처음으로 전어회를 맛 봤다. 그 분이 전어회란 것을 맛 보여 줄 때까지 전어를 회로 먹는다는 것을 몰랐다.


  1970년대 후반에 삼겹살을 아주 맛있게 먹었고 이어서 아나고(붕장어)회를 시작으로 회를 먹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는 귀하여선지 돼지고기를 거의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감자탕이나 삼겹살이 1960년대를 지나 양돈사업이 산업화하면서 먹기 시작한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설명이 이해가 간다.
  그렇지만 회는 어떨까? 아마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예로부터 회를 먹었던 것 같다. 그러니 바닷가 출신인 그 서예가가가 1970년대 후반에 내게 전어회를 맛 보여 줄 수 있었으리라. 난 그 때까지 아나고(붕장어)회를 겨우 맛본 정도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 서예가 처럼 나도 칼을 들고 부엌에 들어 전을 부쳐 볼까?


  얼마전 여기에 "우리나라 옛 사람들의 식생활. '장국타령'과 '눅거리 음식점'..."이란 글을 올렸다.
내가 올린 이 글에 내가 장국타령으로 알고 있던 눅거리 음식점이란 노래가 있다. 그 노래를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침엔 밥, 점심엔 떡, 저녁엔 죽을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은 왜 빠졌을까? 전은 끼니 때마다 찬으로 혹은 부족한 식량을 메우기 위한 간식으로 먹었기 때문에 빠진 것이 아닐까?
알았으니 되었다. 꽃전. 생선전. 고기전... 앞으로 하나씩 하나씩 맛을 보고 또 즐겨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겠다.

 

 

 

 

 나는 집에서 전을 즐겨 먹는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 가족들 모두 전을 즐겨 먹는다.  주로 채소가 원료이다.
그런데 이제는 생선이나 꽃 등 다양한 재료를 쓴 전을 먹어 봐야 하겠다.
내가 요리하지 못하면서 그럴 수 있을까?  그렇게 다양한 전을 부쳐 달라고 집에 말할 수 있을까 주저 스럽다.

그러나 모두 즐거울테니 집에서 위에 등장하는 다양한 재료로 전을 부쳐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봐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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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국지(列國志).                                            춘추전국시대 550년의 역사를 장식한 수많은 나라와 인물과 사건들...

 

 

  열국지列國志. 난 열국지를 퍽 여러차례 읽었다.
지금도 곁에 두고 간혹 읽는데 앞으로도 열국지 읽기는 계속될 것이다.  우리가 흔히 고사성어 혹은 사자성어
고 하는 많은 말들이 열국지에서 출발하였고 등장한다. 공자 맹자 한비자 유가 법가 도가 거의 모든 동양 사들이 열국지에 들어있다.
  열국지는 주周나라 시대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은 그 역사를 지나支那의 역사라고 생
각하는 것 같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지나인지나인들이 은나라 주나라를 동이족의 나라라고 인정하는데 왜 지나의 역사로 끝나야 한다는 말인가? 열국지는 우리 동이족 배달겨레의 역사이기도 하다.

 

* 열국지列國志
   열국지는 삼국지, 초한지楚漢志와 같은 대하역사소설이다.  원명은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다. 주나라가 서융에 쫒겨 동쪽으로 옮겨 동주東周라 하게 되는 BC 770년 부터 진시황이 통일하는 BC 221년까지 550년간의 역사를 소재로 수많은 영웅과 사건과 나라와 인물들이 등장한다.  100여가지의 사건, 200여 개가 넘는 고사성어가 담겨 있다.


* 열국지의 무대(BC 1050 - BC 221)
   소설열국지는 550년간의 역사를 소재로 하였지만 열국지의 무대(BC 1050 - BC221)는 주무왕이 주나라를 세운 BC 1050부터 BC 221 진시황의 통일 때까지로 잡기도 한다.


  열국지의 원작은 명나라 복건성의 여소어(余邵魚)가 쓴 열국지전(列國志傳)이다.
주무왕이 은나라의 주왕(殷紂)을 정벌할 때부터 진시황의 통일까지 800여년 기간을 소설로 썼다. 이후 명청교체기에 풍
몽룡(馮夢龍)이 열국지전(列國志傳)을 개작하여 서주시기는 제외시키고 동주 시대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할 때가지를 취급하여 신열국지(新列國志)라 하였고 이를 다시 청나라 채원방(蔡元放)이 약간의 수정과 윤색을 달아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라고 명명하였다. 소설 열국지의 무대가 800년이 넘을 수도 있고 550년이 될 수 있는 이유이다.  앞으로 누군가가 있어 여소어(余邵魚) 쓴 열국지전(列國志傳)을 모본으로 새로운 열국지가 나왔으면 좋겠다.

                  ( 이 내용은 필자가 평소 알고 있는 내용과 내가 지닌 열국지에 있는 내용 및 인터넷에서 찾은 것을 정리)

 

 

                         수양산 바라보며
                                                          성삼문(成三問)


                    수양산(首陽山) 바라보며 이제(夷劑)를 한(恨)하노라.
                    주려 주글진들 채미(採薇)도 하난것가.
                    비록애 푸새엣 거신들 긔 뉘 따에 낫다니

                   

"이제(夷劑)"는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가르킨다. 채미採薇는 고사리와 같은 산나물을 캐는 것을 말한다. 백이와 숙제가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서자 산으로 숨어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고 고사리를 캐어 먹으며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키다 굶어 죽었다는 고사를 인용하여 지은 시조이다.  비록 하찮은 나물이라도 그 땅이 주나라 땅인데 왜 먹느냐는 것인데...성삼문 같은 충신이 은나라와 주나라에  등장하는 인물을 소재로 시조를 지었는데 그 백이숙제가 누구일까?.


시조에 등장하는 백이와 숙제가 지나인支那人일까? 주周나라(서주西周 BC 1046 ~ BC770)를 세운 주무왕 때의 이야기 이니 3,000년이 지난 옛 인물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은나라의 후예인 고죽국의 왕자들이고, 은나라가 동이족의 나라이므로 당연히 동이족일 수 밖에 없다. 지나의 많은 동이족들이 화하족에 융합 흡수되어 사라진 지금은 그 뿌리를 찾을 수 없게 되었지만 말이다.

 

< 김구용 역. 열국지. 5권으로 되었는데 겉표지가 비단천으로 싸인 것으로 보아 내가 중학교 때 읽은 책으로 보인다 >


본론으로 돌아가서 열국지를 나는 1967년 중학교 때 처음 읽었다.
책이 귀한 시절이었기도 하고, 집이 가난해서 였던가? 우리집에 이런 책은 없었다. 소년한국일보와 소년동아일보 등에서 수호지 손오공 삼국지 등은 만화 혹은 연재소설로 보았으나 열국지란 책이 있다는 것은 몰랐다.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간 후 어느날 도서관에서 5권으로 된 열국지를 발견하였다. 아주 두툼하고 2단으로 편집되어 분량이 많은 책이었지만 난 쉬지않고 며칠 사이에 이 책을 다 읽고 말았다.


  등장인물도 많고, 등장하는 사건도 많고, 등장하는 나라도 많고, 등장하는 고사성어나 사자성어 명언 등이 가득한 이 책을 어린나이에 내가 어떻게 그렇게 읽어낼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이상하다. 이후 중학시절 나의 별명은 한 때 "춘추전국시대"였다.

간혹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자리를 비워야할 일이 생긴다. 그러면 교실은 떠들썩하다. 그런데 선생님이 돌아올 때까지 누가 나와서 이야기를 하고 있어라 하실 때가 있었다. 난 서슴없이 나갔다. 그러고는 열국지에서 읽은 이야기 한 고리를 꺼내어 "옛날 춘추전국시대에~"를 시작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춘추전국시대"인 것이다.

 


당시 읽은 열국지가 어느분이 번역한 것인지 모르겠다.
요즘 살펴보면 이문열 열국지.김구용 열국지 등 여러 책들이 있는데 내가 처음 읽었던  것과 같은 감흥을 주는 책이 없다. 왜일까? 이번에 내가 여기에 쓴 "명정40년酩酊四十年"과 같이 문어체에 가까운 구어체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고전을 번안한 책들은 대부분 읽기 쉽도록 완전한 구어체로 되어 있다. 독자가 있고, 독자들이 그래야 읽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지금 문어체에 가까운 구어체로 책을 출판한다면 팔리지 않을 것이다.


열국지를 연구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난 잘 모르겠다.
열국지에 등장하는 나라들을 정리하고, 인물들을 정리하고, 사건들을 정리하고, 고사성어 사자성어 명언 등을 정리하고, 유가 법가 등 여러가지 사상을 정리하면 좋을텐데... 이미 있는데 내가 모르는 것일까?


열국지에는 춘추오패와 전국칠웅의 흥망성쇄를 중심으로 100여 가지 이야기가 나온다.
공자 맹자 한비자 오자서 손자 관중 포숙아 여불위 진시황 등 열국지에는 춘추전국시대에 활동한  수없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러니 유가 도가 법가 종횡가 등의 학설이 등장하고 손자병법 오자병법 같은 역사에 남은 병법서들이 등장할 수 밖에 없다.

 

먼저 춘추오패(春秋五覇).
제(齊)나라의 환공(桓公), 진(晉)나라의 문공(文公), 초(楚)나라의 장왕(莊王), 오(吳)나라의 왕 합려(闔閭), 월(越)나라의 왕 구천(勾踐)을 가리킨다. 간혹 진(秦)나라의 목공(穆公), 송(宋) 양공(襄公), 오왕 부차(夫差) 등을 꼽기도 한다.


열국지에 실린 이 춘추오패 이야기를 분량이 너무 많아 한 줄 씩이라도 옮길 수는 없다.
다만 제환공의 신하였던 관중과 포숙의 관포지교, 진문공과 개자추의 한식날, 오왕 부차와 월왕 구천의 와신상담, 송양공의 송양지인, 오나라와 월나라의 오월동주, 그리고 순망치한,  결초보은, 상하기수, 토사구팽, 합종연횡, 문경지교(염파-인상여), 계명구도 등 고사성어만 꼽아도 다 꼽기 어렵다.

 


다음 전국칠웅
전국 칠웅(七雄)은 진(秦), 초(楚), 제(齊), 연(燕),  한(韓), 위(魏), 조(趙) 등 강한 7개 국가를 말한다.
소진과 장의의 합종연횡이라함은 가장 강한 진(秦)에 대항하는 방법을 놓고 변설가(소피스트)들이 벌린 활동을 말한다. 결국 진시황에 의해 통일국가 세월질 때 까지 권모술수가 횡횡한다.

 

 

                                                            < 주나라 및 동주열국시대 고지도 >

 

 

나는 지금도 간혹 열국지를 읽는다.
춘추전국시대 수백년 동안 백여가지가 넘는 사건이 수많은 인물들과 얽혀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것을 즐긴다.

열국지는 주周나라 시대의 이야기이다. 춘주전국시대에는 아직 한족漢族이 없었다. 지나(China 支那)도 없었다. 그렇기에 춘추전국시대가 지나의 역사라고 할 수 없다.
  지나인들이 은나라와 주나라가 동이족의 나라임을 인정한다. 비록 그 시대에 활동한 대부분의  동이족들이
화화족에 흡수 융합되었다 하더라도 지나인들도 인정하는데 왜 춘추전국시대의 역사가 지나의 역사로 끝나야 한다는 말인가?
열국지를 읽고 동양사상의 뿌리를 배우자.
우리 동이족 배달겨레의 역사이기도 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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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종합증명서 일사편리. 연내 전국 확대..

 2014.01.18 부터는 인터넷으로 전국 어디서나 발급 및 열람가능...

 

 

 

  정보화 시대와 함께 이젠 부동산관리서류도 정보화가 완성되어 가고 있다.
등기부등본, 전에는 등기부 등본을 뗄려면 등기소에 가서 신청하고 찾으러 오라는 시간에 가서 찾아야 했다.

지금은 신청서 작성하여 내기 바쁘게 발급되어 나온다.
또한 인터넷 등기소에 신청하면 등기소에 갈 것도 없이 바로 뗄 수도 있다.

  그런데 이젠 그 단계를 지나 18가지 부동산 서류를 하나로 통합한 '부동산종합증명서'를 열람하거나 발급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국토교통부에서 내년(2013년 01월 18일) 부터 전국의 모든 시군구 민원실 및 읍면동 주민센터에서 열람하고 발급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인터넷으로 '온나라 부동산 포털'에 접속하여  발급하고 열람할 수 있다니 부동산 관리서류의 정보화가 완성된다고 볼 수 있겠다.

 

            < 부동산 일사편리. '부동산종합증명서' 연내 전국확대. 내년부터는 인터넷과 시군구읍면동에서 발급 및 열람 >


- 부동산 관리 서류 18종 -
토지대장, 임야대장, 공유자연명부, 대지권등록부, 지적도, 임야도, 경계점좌표등록부, 건축물대장(총괄표제부), 건축물
대장(일반건축물), 건축물대장(집합표제부), 건축물대장(집합전유부), 토지이용계획확인서, 개별공시지가확인서, 개별주택가격확인서, 공동주택가격확인서, 등기부등본(토지), 등기부등본(건물), 등기부등본(집합건물)


위의 18종 서류가 단 한장의 서류로 통합된다니 이젠 등기소에 또 시군구청에 일일이 찾아 다니지 않아도 되겠다. 지금 이미 종로구청 등 일부 지자체에서 시범실시 하고 있는데 08월부터 올 하반기 사이에 국으로 확대 된다고 한다.
아래에 공감코리아의 정책뉴스와 인터넷으로 발급할 수 있게 되는 '온나라 부동산 포털'을 링크한다.

또한 이 글의 끝에 사업을 설명한 유튜브 동영상을 링크한다.


* 공감 코리아  부동산 서류 하나로 편리하게 ! '부동산종합증명서' <== 클릭   http://me2.do/5aZ9XV2a
   - 부동산 서류 18종→1종…‘일사편리’ 연내 전국 확대
   - 국토교통부, 부동산종합증명서 서비스…민원인 불편 해소

 

* 국토교통부 '온나라 부동산 포털' <== 클릭   http://www.onnara.go.kr

   - 2014년 1월 18일부터는 인터넷 '온나라 부동산 포털'을 통해 '부동산종합증명서' 발급 및 열람 가능.

 

 

  부동산 일사편리
어떤 명칭을 붙였거나 '부동산종합증명서' 서비스의 명칭이 일사편리라니 앞으로 이용하지 않을 수 없겠다.  부동산 관리서류 18종을 통합한다니 그렇지 않아도 컴퓨터 정보화를 통한 전산화로 편리해진 부동산공부서류 열람 및 발급받기가 한결 편하게 되었다.


  18종. 과연 부동산 관련 공부서류가 많기는 많다.
하지만 물건별로만 보면 8가지라는 게 맞겠다. 가령 개인이 소유한 주택이라고 할 경우는 다음과 같다.

토지대장, 지적도, 건축물대장, 토지이용계획확인서, 개별공시지가확인서, 개별주택가격확인서, 등기부등본(토지), 등기부등본(건물) 등이다.  그리고 대부분 개인은 토지대장(개별공시지가 포함), 건축물대장, 토지이용계획확인서(지적도 포함), 등기부등본(토지), 등기부등본(건물) 등 5가지 서류를 주로 사용하고 다른 서류들은 간혹 필요한 경우에만 사용하고 있긴 하다.


그리고 지금은 거의 대부분의 공부서류를 직접 관공서에 방문하지 않아도 뗄 수 있다.
위 링크 두번째의 '온나라 부동산 포털'은 지금도 지번만 알면 지도를 통하여 위치를 알 수 있고, 공시가나 지적도, 도시계획확인원 등에 있는 내용을 회원가입하지 않도고 확인할 수 있어 난 간혹 편리하사용하고 있다.


 

난 20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부동산과 관련된 업무를 하였다.
감정평가는 말할 것도 없고, 법원경매, 경락, 자산관리, 사용수익, 임대업, 건설업에 이르기 까지 부동산과는 불가분의 일을 하여 온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부동산 서류를 퍽 많이도 가지고 살았다. 모든 부동산 서류는 통상 적어야 5가지가 넘는다.
더우기 나는 통상 위의 서류 외에 몇가지 다른 서류를 더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거의 대부분 부동산 서류에 감정평가서鑑定評價書가 들어 있다. 그리고 해당 부동산의 임대현황표나 납세완납증명서, 재산과세증명서 등이 필요한 경우도 많다.
  그러니 '부동산종합증명서'가 일반화 되면 많은 도움이 되겠다.
글이 장황하여 부동산과 관련된 업무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할 생각으로 뒤로 미룬다.

 

 

* 유튜브 [일사편리] 부동산 행정정보 일원화 사업설명 동영상    http://youtu.be/60ePs83sp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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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사편리' 부동산 행정정보 일원화 설명 유튜브 동영상. 위 ' ▷' 클릭   >

 

 

 


  ‘일사편리(一事便利)’?
일사천리에서 가져온 말이어서 쉽긴하지만 말을 이렇게 함부로 말을 만들서서 괜찮은 것인지 모르겠다.

난 어르신이란 말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고령자를 어르신이라고 하고 있는데, 우리말에서 어르신이란 나이가 많은 사람을 이르는 말이 아니다. 주인 어르신, 대감 어르신에서 보듯 나위가 아니라 지위나 신분에 붙여진 호인 것이다.
 국토해양부의 ‘일사편리(一事便利)’는 강물이 천리를 흐르듯 거침없고 빠르게 진행된다는 뜻의 일사천리(一瀉
千里)를 본따 ‘한 장으로 편하게’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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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비속 소나기에 '나체승우사건(裸體乘牛事件)'을..

 복날을 맞아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를 떠올리면서...    

 

 

  아직 장맛비가 오락가락 한다.
달력을 살펴보니 입추가 08월 07일이다. 이어서 08월 12일이 말복이니 앞으로도 꼬박 한 달은 더위를 견뎌야 하겠다.

 마음이 바빠서인가? 세월이 빨라서인가? 더위가 한창인데 흑야(黑夜)를 채운 개구리의 합창과 함께 가을의 전령사라는 귀뚜라미 소리에 마음을 빼앗겨 달력을 넘겨 본다.
* 07.23(화) 중복  *08.07(수) 입추  *08.12(월) 말복  * 08.23(금) 처서  09.07(토) 백로   09.23(월) 추분

 


건강보험에서 여름속담 몇 가지를 옮긴다. <== 클릭  건강보험 원문   http://me2.do/xOt9Avci
   
 * 비 올 때 마당에서 큰 거품 일면 비가 많이 온다.
    기온이 높은 상태에서 기압이 떨어지면 물속 유기물의 활동이 활발해 거품이 잘 생긴다.
 * 장마 끝물의 참외는 거져 줘도 안 먹는다.
    장마 때에는 강수량이 많아 과일의 맛이 떨어진다.
 * 여름비는 소 잔등을 가른다.
    여름 소나기는 국지성이 강해 소의 잔등도 비를 맞는 부분과 맞지 않는 부분이 갈릴 정도라는 뜻.

 

                                                          < 수주 변영로의 명정 40년. 범우사 간 >


여름 소나기.  "여름비는 소 잔등을 가른다." 속담을 읽으며 생각을 편다.
황순원의 단편 소나기도 생각나지만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의 ‘백주나체승우사건(白晝裸體乘牛事)’이 생각 난다.
백주나체승우사건. 말 그대로다. 대낮에 나체로 소를 탄 사건인 것이다. 수주 변영로가 영문학자이고 시인이고 수필가이고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난 그의 "명정40년(酩酊四十年)"에 반했다. 20대에 이 책을 읽은 이래 잊고 있다가 또 찾아 읽으면 또 재미가 있다.

 

  내게 있는 책을 보면서 ‘백주나체승우사건(白晝裸體乘牛事件)’의 개략을 옮겨 본다.
내가 가진 명정40년(酩酊四十年)은 1977년 발행한 범우문고본이다. 이 책은 표지가 까맣다. 거기엔 이 '나체승우사건'을 '백주(白晝)에 소를타고'라는 작은 제목으로 올려 놓았다.  수주시대가 나보다 한 세대 혹은 두 세대쯤 전이어선지 글이 구어체에 가까운 문어체여서 읽기가 재미있다.

 

 '백주(白晝)에 소를타고'
역시 혜화동 우거에서 지낼 때였다. 어느 하룻날 바커스의 후예들인지 유령(劉伶)의 직손들인지 몰라도 주도(酒道)의 명
인들인 공초(空超 吳相淳)ㆍ성재(誠齋 李寬求)ㆍ횡보(橫步 廉尙燮) 3 주선(酒仙)이 내방하였다.
-이하. 요약-

술값이 없던 그들은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에게 사람을 보내 술값을 부탁했다. 인촌이 선뜻 준 50원(圓)을 가지고 이들은 소주 한 말과 쇠고기를 사들고 성균관대학(成均館大學) 뒷산으로 올라갔다. 객담(客談)ㆍ농담(弄談)ㆍ치담(痴談)을 섞어 주기(酒氣)가 한껏 올랐을 때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문득,  

   “우리 모조리 옷을 찢어버리자.”

는 공초(空超)의 발의로 모두 탈의(脫衣), 일사불착(一絲不着)의 나체가 되었다. 옷이란 대자연과 인간 두 사이의 이간지물(離間之物)인 이상 몸에 걸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덧 언덕아래 소나무 그늘에 소 몇 필이 매여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번에는 누구의 발언이거나 제의였던지 이제 와서 기억이 미상하나 소를 잡아 타자는 데 일치하였다. 이들은 일사불착(一絲不着)의 나체로  옆에 매인 소를 타고 비탈길을 의기양양하게 내려갔다. 백주(白晝) 적안(赤顔)의 이 ‘나한(裸漢)’들은 시내로 진출하려는 장도(壯圖)를 도중의 일대 소동으로 포기했지만, 심기(心氣)는 먹구름 덮인 하늘을 뚫고 치솟을 수 있었다.
                                           ( 1977년 발행 범우문고 명정40년酩酊四十年에서 발췌, 일부 요약 )


수주, 공초, 성재, 횡보, 이런 사람들이 소주 한 말을 마시다가 소나기를 만나 공초의 제의로 나체가 된 후 들에 매어진 소를 타고 서울 명륜동에서 공자를 모신 성균관을 지나 큰 거리까지 진출한 것이다.
  1920년대 우리 선배들의 기행이지만 왜정倭政치하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수주가 어려서 술독에 빠질일 부터, 술을 마시고 친구 집에서 자다가 화장실을 잘 못 찾아 안방을 침투하여 1년 가까이 그 친구와 인사조차 나누지 않고 지난 일 등 아무튼 이 명정40년(酩酊四十年)에는 갖가지 술을 마시고 벌린 기행 기담이 실려 있어 몇몇 젊은이들에게 권하였지만 한자(漢字)말이 힘들다고 읽다 중단하는 것을 보았는데 장맛철 소나기를 보면서 ‘백주나체승우사건(白晝裸體乘牛事件)’을 떠올리고 있다.

 

 

술에 대한 이야기라면 또 한 권의 책이 있다.

나는 자칭 국보1호라는 양주동(梁柱東) 박사의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를 몇 해 전부터 노리고 있다. 

어떻게 문주文酒인가? 예로부터 주태백이란 말이 있지만 양주동 박사도 주당酒黨이었을까?

 

 

양주동 박사는 1903년생이니 내가 중학교 다니던 1967년 쯤에는 나이가 65세쯤이었을 것이다. 그 때도 보신탕을 먹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다툼이 있었는 것 같다. 그 때는 흑백 TV였는데 토론에 참가한 양주동 박사가 의견을 내 놓았다.

 

 "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개'라하여 먹지 말아야할 이유는 없다.

   다만 자기집에서 기른 개나 애완견을 먹는 것은 피해야 할 것이다. "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양주동 박사는 얼굴이 옥상에서 떨어뜨린 메주처럼 찌그러졌다는 말을 들었었기에 양주동 박사가 나온 그 토론을 더 관심을 갖고 보았었던 것 같고 비록 어린나이였지만 박사의 고견에 탄복하였었다.  지금이 초복지나 중복이 내일(2013.07.23 화)인데 복땜을 뭘로 할까?  우리나라는 아직 개의 유통이 위생상태가 나쁘다는 기사를 연일 보았는데...

 

몇 년전 범우문고의 목록을 보다가 양주동 박사의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를 발견하고 보겠다고 생각하였으면서 수년째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상하게 문文과 주酒를 제목으로 사용하였으나 문文을 이야기하였더라도 주酒를 빠뜨리지 않았을 것 같아 문文도 관심이 가지만 그보다 주酒를 어떻게 표현하였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

 

삼복더위 한 가운데서 장맛비 소나기를 보면서 ‘백주나체승우사건(白晝裸體乘牛事件)’을 생각하고, 개에 대한 신문기사를 보면서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를 생각하는 것을 누가 탓하랴......

 

                                    < 자칭 국보 1호 양주동 (梁柱東) 박사의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 >


 

 중복, 입추, 말복, 처서, 백로, 달력을 짚어 보면서 마음은 가을을 향해 달린다.
봄에 뿌리고, 여름에 키우고, 가을에 거두고, 겨울에 감추고, 나이들면 세월이 빨라진다더니 가을이 멀지 않았
음을 절실히 느낀다.
잠자리 나르고 보고 귀뚜라미 울어대는 것을 들으면서 벌써 가는 여름이 아쉽다.
정열의 여름, 풍성함을 키우는 여름을 즐겁게 보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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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옛 사람들의 식생활. '장국타령'과 '눅거리 음식점'...
'눅거리 음식점'이란 노래? 난 이 노래를 '장국타령'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식생활.
지금은 배고픔을 벗어났다지만 불과 반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렇게 풍족하지 못했다. 그보다 이전 인공때
(6.25 사변. 김일성의 난)나 그보다 이전 해방공간(1945~48 광복부터 정부수립까지) 또 그보다 이전인 왜정倭政때(왜倭 강점기)는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먹을 것이 없으니 하루 세 끼니를 밥을 찾아서 먹을 수 있겠는가?
아침에는 밥을 먹었지만 점심에는 떡을 먹고 저녁에는 죽을 먹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가 지금도 간혹 부르는 장국타령으로 알았던 노래는 다음과 같다.


                         내가 '장국타령'으로 알았던 노래


                    아침때가 되었으니 어서 오십쇼 무엇을 드릴까요 골라 잡으슈
                    장국밥에 설렁탕 육개장국 비빔밥 수염이 대자라도 먹어야 산답니다.


                    점심때가 되었으니 어서 오십쇼 무엇을 드릴까요 골라 잡으슈
                    빈대떡에 개피떡 수수팥떡 인절미 수염이 대자라도 먹어야 산답니다.


                    저녁때가 되었으니 어서 오십쇼 무엇을 드릴까요 골라 잡으슈
                    녹두죽에 보리죽 콩나물죽 시래기죽 수염이 대자라도 먹어야 산답니다.


위 노래는 아무래도 학창시절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침에는 밥을 점심에는 떡을 저녁에는 죽을 먹고 살았다는 이야기와 함께음악시간에 배웠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니라면 언제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겠다. 아래 "눅거리 음식점"의 가사와 비교하면 가사가 단조로운데 학생들에게 지나친 노랫말을 순화시켜서 배웠던 것 같다.

 

위 노래의 가사를 보면 확실하게 아침에는 밥이나 탕을 먹고 점심에는 떡을 먹었으며 저녁에는 죽을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과 100년도 되지 않은 아니 불과 반 세기도 지나지 않은 우리의 삶을 우리는 잊고 산다.  하지만 이렇게 노랫말에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 아버님이 자주 하시던 말씀 가운데 하나가 생각 난다.


  "설움 설움 배고픈 설움보다 더 큰 설움은 없다."


아버님의 말씀에 의하면 일 주일을 굶어도 똥은 마렵다고 한다. 그러데 이렇게 굶으면 변비상태가 되는 모양이다. 이렇게 굶고 똥을 누면 결국 피가 묻은 콩알만한 똥을 겨우 눌 수 있다고 하셨다. 이것이 구한말(조선말) 19세기가 홍경래란을 시작으로 한 민란의 시대가 됀 원인이었고, 또 왜의 수탈 때문에 이어진 우리민족의 배고픔이었다 할 것이다.
  그러니 하루 세 끼니를 밥을 먹지 못하고 떡과 죽으로 연명할 수 밖에 없었고 그랬기에 이런 노래가 불려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 노래가 듣고 싶어져 인터넷을 찾아 보았다.
뜻밖에 내가 알고 있는 장국타령이 아니라 "눅거리 음식점"이라는 노래가 나타났다.

 

 

                                    < 1930년대 '눅거리 음식점'을 부른 이규남의 노래가 담긴 음반집 >

 

 

                         눅거리 음식점


                                         노다지 작사   석일송 작곡   이규남 노래
                                         1938년 12월 빅타레코드  빅터 유성기 원반 시리즈 - 30년대 만요(코믹송)

 
                 1. 아침때가 되었으니 어서들 오쇼
                    무엇을 드릴까요 골라잡으쇼
                    장국밥 설렁탕 육개장국 비빔밥
                    땅덩이가 깨어져도 먹어야 산답니다
                    어서 오세요 눅거리 음식점 어서 오세요


                 2. 심때가 되었으니 어서들 오쇼
                    무엇을 만들까요 일러주십쇼
                    빈대떡 개피떡 수수팥떡 인절미
                    수염이 석 자라도 먹어야 산답니다
                    어서 오세요 싸구려 음식점 어서 오세요


                 3. 저녁때가 되었으니 어서들 오쇼
                    무엇을 잡수세요 말씀하십쇼
                    녹두죽 보리죽 콩나물죽 씨래기죽
                    하늘이 무너져도 먹어야 산답니다
                    어서 오세요 눅거리 음식점 어서 오세요


이 노랫말을 국악방송 블로그에서찾았다. 설명의 일부를 아래에 옮긴다.


 * 만요가수열전(2) 이규남 (2010. 8. 3. 화) / 진행자 윤중강 글 <== 클릭  http://blog.naver.com/fm991/20112434794 

   1938년 빅타레코드에서 발매된 '눅거리 음식점'의 노랫말이다.
   ‘눅거리 음식점’은 요즘말로 하면, ‘싸구려 음식점’입니다.
   이 말은 현재 우리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고, 북한에선 사용하는데, 북한의 '조선말 사전'에는 '일반 시세보다 싼 것'으로 풀이했습니다.


'장국타령'으로 알고 있었는데 '눅거리 음식점'이란 곡으로 나타났다?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김포지방의 민요로 알려져 있는 여름(*)이라는 노래가 김영수 작사 홍난파 작곡의 여름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 '장국타령'도 원래 우리가락 타령이 있었고 이 것을 '눅거리 음식점'으로 채보 편곡하여 빅타레코드에서 음반으로 출반하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위 설명에 그 부분이 없어서 더욱 궁금하다.
(* 여름: ♪ ♬~ 도라기 캐러간 바구니 속에 나리꽃 메꽃이 웬일인가요 ~♬ ♪)

 


"장국타령"이거나 "눅거리 음식점"이거나 간혹 이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이제는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을 즐기기 위해, 또 몸을 생각하여  떡도 먹고 죽도 먹는다.  죽을 파는 사업장이 성업중이고 미수의 노모께서 좋아하셔서 간혹 사들고 집에 들어간다.  그 죽집에서 담가 주는 동치미를 좋아하시는데 집에서 담그면 그 맛이 나지 않아 죽을 안 사도 될 경우고 사가지고 들어 가기도 한다.  1930년대, 왜정시대倭政時代 그 어려운 때도 떡집도 죽집도 있었던가 보다.

 


"죽거리 음식점"을 생각하며 혼자 부르다 보니 또 한 곡의 노래가 떠오른다.
이 노래도 아마 어떤 타령이나 우리민요의 하나일 것 같은데 언젠가 확인하여 보아야 하겠다.

 

                    종로 네거리에 해가 저물어 호라 호라 부르며 수레를 끌고
                    엿장수 할아버지 지나가는데 데깍 떼깍 가위소리 처량도 하다
                    가라 가라 고루 고루 고룰 가라 가라~ 고루 고루 가라 부르면서
                    이웃집 동갑네야 잘있거라 내일다시 또 만나보자 또 만나보자


                    어떤 촌영감이 정거장에서 차표를 20전만 감해달라고
                    기차는 시간되어 떠나가는데 껑충껑충 뛰어가며 감해달란다
                    가라 가라 고루 고루 고룰 가라 가라~ 고루 고루 가라 부르면서
                    이웃집 동갑네야 잘있거라 내일다시 또 만나보자 또 만나보자

 

 

위의 노래도 나는 곧 잘 부른다.
"가라 가라 고루 고루 고룰 가라 가라~ " 이 부분은 지금은 시골 축제장에서나 볼 수 있는 엿장수가 엿가위 치는 소리인 것 같은데 의성어라 해야할까?  엿가위를 치면서 사람을 모으는 엿장수를 모르는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후렴이다.


그런데 노래 제목도 모르겠고, 아는 게 없다.
이렇게 글을 쓰다가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찾아지는 일이 간혹 있기에 찾아 본다. 앗! 그런데 있다.


 * 종로 네거리 http://blog.daum.net/bak588/12421962  <== 클릭   가사와 함께 노래가 있음.


오래전에 고 서영춘 선생님이 '기차놀이(*)'라는 노래를 발표했는데 그 노래 가사에 비슷한 곳이 있지만 완전히 다른 노래임이 분명하다.

( * 서영춘 노래 기차놀이.  "시골영감 처음타는 기차놀이에 차표파는 아가씨와 싱갱이하네 이세상에 에누리 없는~" )

 

 


나의 아버님은 만주에서 철도 부설 인부로 일을 하셨다고 하신다.
왜정倭政때였고 머나먼 배달벌(*)땅이었으니 일 주일씩 굶으면서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을까?
숲에 들어가 땅벌의 꿀을 발견하여 잘 먹었다고 하시던 이야기가 생생하다.
장국타령, 눅거리 음식점, 종로 네거리 나 아니라도 기억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나도 거기에 한 줄 보탠다.
우리나라에 "역사 잊는 사람이 역사 보복을 받는다는 말 있다"을 하신 분이 계시다.
또 미국의 어느 역사학 교수는 "역사를 공부하는 것 자체가 역사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하찮은 노래라 하지말고 기억하는 것이 역사가 될 것이다.

( * 배달벌. 만주를 배달벌이나 동북아벌이라고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밝 누 리. 나 용 주

[밝은 우리의 온 삶터]

-밝은 밝음이며, 온은 따뜻함(溫)이고 모두(全 온통)이며, 누리는 살아가는 세상이고 살아가는 역사 입니다-

Posted by koreanur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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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 동산경매. 부동산 경매.<3> 경락받은 부동산에 있는 물건에 동산압류가...

동산경매로 살림살이 마련하기...

 

 

  61억 3백에 경락 받은 백화점 안에 동산압류 된 물건들이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말하지만 이 글은 부동산이나 동산압류, 가압류 등의 업무 흐름을 말하려는 것이지 법령이나 법리를 해석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늘(2013.07.18 목)은 경락 받은 부동산을 명도 받아 보니 안에 있는 물건들에 동산압류가 되어 있을 경우 어떻게 대처하는 게 좋을까를 실무경험을 토대로 설명하려고 한다.
그동안 관련글 셋을 여기에 올렸다.


1. - 짜고치는 고스톱 -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2012.12.21
2. 경매. 동산경매. 부동산 경매.<1> 61억 3천에 백화점을 경락받아...  2013.06.12
3. 경매. 동산경매. 부동산 경매.<2> 경락받은 부동산 명도明渡(건물을 비워 넘겨줌)받기... 2013.07.04

 
위 글들은 여기에 올라 있다. 위 세 개의 글에 이어 네 번째 글을 시작한다.
참고로 이 글 말미에 "경매로 세간살이 마련하는 방법"을 붙였으니 건너 뛰어 읽어도 좋을 것이다.

 

                      < 대법원 법원경매정보 홈페이지. 부동산 동산매각공고를 각 법원별로 열람할 수 있다.>

 


채권은행과 채무자의 백화점 대표이사 인수인계를 받아 경락잔금을 마련하고 임차인들의 분쟁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난데 없는 어려운 일이 생겼다. 백화점의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에 동산압류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백화점 운영에 필요한 금전등록기와 방송장비 등에도 동산압류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하에 있던 수퍼마켓의 상품들에도 집달리가 동산압류를 하여 놓았다. 거기에 하나 더 한전의 전기요금이 기천만 원 연체되어 있었다.


61억 3백에 경락 받았고, 임대보증금 반환 등 생각지 않은 돈이 들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이 동산압류는 자금계획을 완전히 바꾸어야할 만큼 중대한 일이었다.

 


그 내용을 정리하여 본다.


1. 백화점의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에 OO세무서에서 동산압류
2. 금전등록기와 방송장비, 공조기, 냉난방기 등 값 나가는 물건들을 개인채권자들이 동산압류
3. 백화점 지하의 대형 수퍼마켓의 모든 상품을 개인채권자들과 납품한 메이커에서 동산압류
4. 제세공과금의 체납, 특히 한전 저기요금이 기천만원 미납되어 전기공급을 받지 못할 상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잘 못하면 경락대금 외의 돈을 많이 투입하여야 할 우려가 있는데다, 세무서, 개인채권자, 납품 메이커, 한국전력 등 이들 모두와 관계를 나쁘게 하여서도 안 되는 일이니 난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씩 어떻게 해결하였는지 설명하여 본다.


1. 백화점의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에 OO세무서에서 동산압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데도 아닌 세무서에서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에 압류하였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세금은 경락대금에서 최우선 변제 받는 채권에 속하므로 법원에 배당신청을 하였으면 깨끗히 해결될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생각 밖으로 어느날 세무소에서 공문을 보내왔다. 체납세금이 수억원에 달하고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에 압류하였으니 그 세금을 납부하고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임원회의와 간부회의를 잇따라 열어 의논하여 보았으나 난감하고 도움되는 내용은 없다.
법무사, 변호사, 법률사무소, 법원경매담당계장 등과 협의하여 보았으나 말들이 다 달라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알 수도 없고 확실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은행의 송무부에 근무하면서 부동산 경매를 하여 봤지만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가 따로 동산압류의 대상이 되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판례집을 뒤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인터넷에 판례를 검색할 수 있는 곳이 많지만 1980년대 중반엔 아예 인터넷이 없었다.  그러니 판례집을 구하기도 어렵지만 그 판례집에서 하필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가 따로 동산으로 취급하여 압류하였을 때에 대한 판례를 찾는 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그러나 결국 찾았다.
어느법이었던가? 부동산이 무엇인가를 정의한 법조항이 있었다. 지금 찾기는 귀찮고 그냥 대강만을 설명한다. 부동산이라함은 부동산과 그 부동산에 종착된 물건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TV를 건물에 시멘트라던가 다른 강력접착제로 분리하지 못할 만큼 붙여서 종착 되었다면 그 TV는 부동산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가 건물에 종착되어 있으니 따로 동산으로 보아 동산압류를 수 없는 것이다.


어렵게 이 법조항을 찾았고 동 조항에 의해 동산압류를 취소시킨 판례를 찾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다 해결 되는 게 아니다.
세무서와 관계를 나쁘게 하면 안 된다. 세무서의 주무자를 설득하여야 한다. 담당 직원을 만나 법조항과 판례를 복사한 서류를 건네 주면서 좋을 방법을 찾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며칠 후 압류취소를 요구하는 공문을 작성하여 달라는 연락이 왔고, 나는 누구를 시키지 않고 내가 직접 공문을 작성하여 세무서에 보냈다. 발신. 수신. 참조. 제목. 내용. 기타. 첨부서류 등으로 공문을 작성하는 것은 군대에서 작전서기병(S3)로 근무하면서 전통과 전령전을 많이 작성한 것을 시작으로 내가 은행에 근무하는 동안 나의 주특기의 하나였으니 구태여 남에게 시킬 필요가 없었다.


결국 세무서에서 압류를 취소한다는 공문을 보내왔다.
이렇게 고심은 하였으나 돈을 들이지 않고 동산압류 한 건을 해결하고 세무서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2. 금전등록기와 방송장비, 공조기, 냉난방기 등 값 나가는 물건들을 개인채권자들이 동산압류

 

   지금은 바코드를 읽어 들여서 즉시 정산하는 시스템이 모든 대형양판점에 설치되어 있지만 1980년대 중반에는 어디나 금전등록기가 설치 되어 있었고 값이 제법 나갔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백화점에선 음악을 흐르도록 하여야 할 뿐 아니라 고객들에게 공지사항을 알리는 것도 방송장비가 하는 일의 하나이다. 방송장비는 당시 기천만원이 나갔으며 금전등록기도 각 층마다 수십대씩 설치되어 수백대에 이르니 새로 마련하자면 큰 돈을 들여야 한다. 사무실 집기 등 기타 물건들은 다소 돈이 들더라도 별 문제가 아니지만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생겼다.
그 백화점에서 여러 장비를 담당하였던 기사가 날 찾는 것이었다. 방송장비 등 여러 값나가는 장비안에 있는 기판과 부품등을 도난당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값 비싼 기기였지만 껍데기만 남아 고철이나 다름 없었다. 그리고 금전등록기도 일부 영업점에서 사용하는 것을 빼고는 대부분 낡았다는 것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했더니 그 기사가 좋은 방법을 알려 주었다.
새 제품을 사지 말고 케이스와 부품들은 있으니 주요부품만 중고품으로 사거나 제조사에 A/S 의뢰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새 제품을 구매하는 것의 1/4 이하의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법원 집달리 사무소를 찾아 담당 집달관을 만나 설명하였다.
아마 백화점 근무자들이 월급을 제대로 못 받아 중요 부품을 빼다가 팔았는지 모르지만 압류한 물건들이 고철이나 다름없으니 다시 평가하여 경매하여 달라고 요구 하였다.

 

집달관은 채권자들과 협의에 들어 갔다.
부동산의 소유가자 바뀌었으니 동산경매를 속행해야 하는데 과거 압류 당시의 감정가로는 동산경락을 받을 사람이 없다.  그러니 채권자들이 적당한 금액을 정하여 경락 받던가 아니면 경매를 진행하여 경락대금만을 받아 가라는 설명이었다. 결국 동산경매를 진행하였고 채권자들이 경매신청을 하여 들어간 비용 정도로 내가 경락을 받았다.

 

결국 값이 나가는 여러 장비들을 큰 돈 들이지 않고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부품들이 도난을 맞았으니 중고품이라도 다시 사는 비용을 별도로 들였지만 새 것을 사는 데 비할 바가 아니다.  그 부품들을 과연 누가 훔쳐 갔으며 나중에 어떤 경로로 다시 내가 사들일 수 있었는지 의심이 가지만 안다 해도 이젠 벌써 25년이 헐씬 넘은 옛일이다.

 

 

3. 백화점 지하의 대형 수퍼마켓의 모든 상품을 개인채권자들과 납품한 메이커에서 동산압류


   수퍼마켓, 지금은 거의 대부분 편의점으로 바뀌고 아니면 OO마트의 형태로 바뀌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에는 OO하이퍼마켓이란 새로운 대형 양판점이 막 등장하는 초기였고 편의점도 마트도 없었다. 

내가 경락받은 백화점의 지하에도 큰 수퍼마켓이 있었다. 그런데 수퍼에 진열된 모든 상품들이 동산압류 되어 있었다.


그런 상태로는 백화점을 운영할 수 없다.
난 은행 송무부에서 근무하면서 집달관과 동산압류 가압등의 집행을 많이 하였으므로 업무의 흐름을 잘 알고 있었다. 역시 압류하였던 집달관을 만나 백화점에 진열된 상품들이 식료품의 경우 부패 되었고, 공산품도 낡아져서 가치가 없다. 이 것들을 쓰레기로 치우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빨리 경매를 진행하여 달라고 하였다.


수퍼마켓의 모든 동산압류 물건을 위 2항의 기기들과 마찬가지로 채권자들이 압류비용으로 납부한 비용 범위에서 내가 경락을 받았다.  그러고는 정말 쓰레기로 버릴려고 하였다.  그런데 아니었다.  역시 부도나기 전에 백화점에 근무하였던 부장 직급의 한 사람이 그 물건들을 메이커에 1:1 반환 요구를 하라는 것이었다.


이 후 백화점 업무를 하면서 음료와 커피 등은 돈을 들일 이유가 없게 되었다.
수량을 파악하여 메이커 해당지역 담당자에게 연락하면 조건없이 1:1 교환에 응하여 주었다. 백화점을 다시 열 것이 분명하고 반품을 안 받아 줄 경우 경쟁사에 납품권을 빼앗길 수 있으니 울며 겨자먹기로 응하였지만 그 영업책임자들도 본사에 보고하여 처리하는 것이니 비용을 자기들이 부담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백화점의 수퍼마켓에 있는 물건들의 대부분은 이 후 약 6개월에 걸친 분양상담과 오픈작업을 하는 동안 소진 되었으나 그만큼 비용을 절약할 수 있었던 것이다.

 


4. 제세공과금의 체납, 특히 한전 전기요금이 기천만원 미납되어 전기공급을 받지 못할 상태.

 

   위 1항의 세무서에서 압류한 세금도 그렇지만 제세공과금의 대부분은 법원 경락대금에서 우선변제를 받아 간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거나 남아 있는 제세공과금은 새 부동산 소유자가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일이 된다.


한국전력의 전기요금이 기천만원 연체 되어 있었고 그 돈을 내라고 연락이 왔다.
영업을 하려면 전기를 안 쓸 수 없고, 억울하지만 어쩔 것인가? 한전의 담당자를 만나 지금 경락잔금 납부를 하지 못한 상태이니 매월 발생하는 현재 사용하는 전기요금은 낼테니 단전은 하지 말라고 하였다.

지역사회에서 백화점을 살려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었으니 한전으로서도 단전조치를 취하기는 부담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경락자나 부동산의 새 소유자가 옛 소유자의 전기요금을 부담하지 않아도 된다.
여러차례 전기요금 때문에 여러차례 소송이 있었고 새 소유자에게 전기요금을 부담 시킬 수 없다는 판례가 확정 되어 한전에서도 그렇게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에는 그런 판례가 확정되어 있지 않았다.
당시는 그런 판례가 확정되지 않아 억울하게 전기요금을 시일을 두고 분납하였지만 백화점을 그랜드 오픈하고 난 이후 분할하여 연체된 요금을 납부하였으니 큰 부담은 되지 않았다.  그 외의 자잘한 여러 공과금들도 대부분 시차를 두고 해결할 수 밖에 없었다.  경락받을 부동산의 권리분석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현장에 부딪히면 역시 경락자가 후해야 한다.  싼 값에 법원에서 경락받아 들어간 처지에 너무 인색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대처를 잘못하였더라면 큰 부담이 될 다른 채권자들의 동산압류를 이렇게 적절히 처리할 수 있었으니 다행이었다.  임기응변? 꼭 그렇지는 않다.  의문을 갖고 부단히 알아보고 좋은 방법을 찾아 상대방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잘 이해시키고 설득하면서 필요한 만큼 양보하여 이룬 것이라고 생각한다.

 

 

 

 

     * 이제 위에 말한 동산경매로 세간살이를 마련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법원의 동산매각공고. 매각장소 물건목록 감정평가액 등이 각 법원별로 공고된다.>

 


* 동산경매 = 경매로 세간살이도 마련할 수 있다?   <== 클릭   http://me2.do/GK8QHQC9

* 대법원 법원경매정보(대표전화 02-3480-1715)  ==> 클릭   http://www.courtauction.go.kr
   > 기관정보 경매물건, 경매공고, 경매지식, 매각통계, 이용안내

 

윗 글과 대법원경매정보 홈페이지를 살펴보면 동산경매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법원경매정보 홈페이지에 들어가 윗에 있는


 + 위에 있는 "경매공고" -> "동산매각공고"


의 순서로 찾으면 자기가 주거하는 지역의 법원에서 진행하는 동산경매 목록을 볼 수 있다.

부동산매각공고도 있지만 이 글의 목적이 동산경매를 쓰는 것이므로 생략한다.

 

그리고 실제 진행간에 일어나는 몇 가지를 설명하니 참고하기 바란다.


하나 : 동산을 경락 받을 때는 경락대금을 경락 당일에 일시불로 지불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둘 : 경락받은 동산은 현장에서 즉시 옮길 수 있지만 한 달 까지는 현장에 보관할 수도 있다.


셋 : 경락받을 동산에 대한 철저한 검토필요

     위 사이트에 있는 동산매각공고를 본 다음 법원을 방문하여 집달관의 집행기록 열람으로 확인하였다 하더

라도 경락 받을 물건을 잘 토하여야 한다. 집달관은 동산압류시 목록을 작성하고 평가액을 기록하지만 환가가 어려운 물건이 아닌 경우 경험에 의해 경매가격을 매긴다.  그러므로 실제 물건의 가치와 경락가가 다른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경우 시중가보다 싸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생길 수 있으므로 잘 살펴야 하는 것이다.

 


참고로 값을 산정하기 어려운 기계류 등은 집달리가 별도의 방법으로 감정하여 경매가를 정한다.


'꾼'이라는 말이 있는데 '꾼'이 동산경매에 등장하는 것은 소자본으로 차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동산경매는 부동산 처럼 큰 돈이 필요하지 않는데다 실제 경매진행에서 시중가 보다 턱없이 낮은 가격에 경락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런 물건을 '꾼' 들이 잡아 두고 원래 소유자였던 채무자에게 되팔기도 하고 물건을 옮겨 처분하여 수을 올리기도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망한 집의 물건을 사들여 사용하기를 꺼린다.

그래서 동산경매에 일반인이 참여하는 일이 많지 않다.

그러니 '꾼'들이 끼어들 여지가 더욱 늘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간살이를 마련하는데 동산경매를 활용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세간살이가 아닌 공산품이나 기계류, 미술품 등 여러 물품들도 법원 집달리 뿐 아니라 세무서 세관 등 여러기관에서 동산경매를 하는 경우가 있으니 잘 살피면 뜻밖에 좋은 물건을 값싸게 구입할 수 있을 것이다.

 

 

 

경매. 부동산경매. 동산경매. 동산가압류. 부동산가압류. 채권 및 기타 재산권에 대한 압류 및 가압류...

법령과 법리를 설명하지 않고 실무와 경험을 바탕으로 설명하는 것이지만 앞으로 더 글을 써야할 것이다.

경매와 관련하여  내가 설명하려고 하였던 11가지 가운데 아직 6가지가 남아 있고 가압류 가처분 채권 및 기타재산권 등 설명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요즘 전국 법원에 공장물건의 경매가 많다는데 그에 대하여도 실제 공장을 경락을 받아 운영한 경험을 설명
할 기회를 만들려고 한다.
 


 

 

 

 

 

 

 



 

 

 


.밝 누 리.

[밝은 우리의 온 삶터]

-밝은 밝음이며, 온은 따뜻함(溫)이고 모두(全 온통)이며, 누리는 살아가는 세상이고 살아가는 역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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