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 신지명사십리薪智鳴沙十里와 정도리 구계등 몽돌해변의 추억..

 

 

명사십리鳴沙十里
울명鳴 모래사沙 모래가 우는 십리에 이르는 해변? 그런 말일까?
완도에서 십여분 배를 타고 들어가면 신지도라는 섬이 있다. 그 섬에 신지명사십리薪智鳴沙十里 해수욕장이
있다. 이 신지명사십리 해수욕장의 다른 이름은 모래를 밟으면 우는 소리가 나서 ‘울모래등’이라고 한다. 명사(明沙)가 아닌 명사(鳴沙)라 쓰고 있으며, 이 울모래가 거의 직선으로 동서 10리나 뻗어 있어서 명사십리해수욕장이라 한다.

 

 

           <신지도 명사십리 해수욕장. 모래를 밟으면 우는 소리가 나서 '울모래등'이라고 불리는데 3.8Km에 이른다.>


신지도는 이젠 섬이 아니다.
2005년 1,110m 길이의 신지대교가 개통 되어 연륙이 되었다. 완도항에서 배를 타고 건너가야 했던 신지도를 이제 차를 타고 5분 정도면 갈 수 있다. 이 곳 신지도에 신지도명사십리해수욕장이 있다.


우리나라에 명사십리가 몇 곳일까?
원산에 있는 명사십리(明沙十里)는 한자가 다르다. 울명鳴이 아닌 밝을명明이다.
내가 알기엔 우리나라에 예로부터 인정받고 있는 명사십리는 세 곳이다. 갈 수 없는 북한의 원산의 명사십리明沙十里, 이제는 새만금 방조제로 육지와 거의 연결된 고군산열도의선유도 명사십리 해수욕장 그리고 완도의 신지도 명사십리 해수욕장 등이다. 원산과 선유도의 명사십리明沙十里와 완도군 신지면의 명사십리鳴沙十里리는 한자가 다르지만 우리말로는 구별할 수 없다. 그 외에도 여러곳에 명사장 혹은 명사십리라고 불리는 해변이 있으나 모두 아름다움을 강조하기 위하여 임의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지 명사십리는 세 곳이다.


 그리고 몽돌 해변은 또 몇 곳이나 될까?
몽돌 해변 혹은 몽돌 해수욕장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은 아니지만 전국 곳곳에 제법 있는 것 같다. 큰 섬이나 이름난 해변에 크고 작은 몽돌밭이 여러 곳 있다. 내가 가 본 곳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몽돌해변은 거제도와 남해도에도 있지만 완도 정도리 구계등 몽돌해변이다.

 

    < 지도의 좌상 - 장보고의 청해진 유적지 장도. 우중 - 모래가 운다는 울모래등. 좌하 - 몽돌해변 정도리 구계등>


1970년대 중반이었니 벌써 40년 되었다.
깨복쟁이 친구들과 완도 신지도의 명사십리로 해수욕을 갔다. 하룻밤만 해수욕장에서 지내고 다음날은 도망쳐 완도로 나왔고 그래서 찾아간 곳이 완도 정도리 구계등에 있는 몽돌 해변이었다.


깨복쟁이 친구. 내가 자란 마을은 퍽 평화롭고 인심좋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살던 마을이었다. 나의 깨복쟁이 친구들은 20여명이 되는데 1960년대 초반을 지금은 용어조차 생소한 울력이란 것을 하여 타온 밀가루 수제비라도 이웃집에 돌리며 살았다. 죽마고우, 깨복쟁이 친구, 그들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립다. 전쟁(인공난. 6.25 사변)은 지났다지만 아직 보릿고개가 남은 시절이어선지 깨복쟁이 친구들을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이 학업을 지속하지 못하고 일찍 돈벌이를 나설 수 밖에 없었다.


1970년대 초반을 지나 대학교에 다니는 나를  깨복쟁이 친구들이 선망의 대상으로 생각하였을까? 그런데도 날 따돌리지 않고 함께 해수욕장을 갔으니 그냥 똑같은 친구로 생각하였을까? 1970년대 중반 언제였을까? 깨복쟁이 친구들과 완도의 명사십리 해수욕장에 텐트를 치고 해수욕을 즐기게 되었다.


젊음이 한창인 20대 초반의 친구들이 모였으니 어찌 즐겁지 않았겠는가?
10여명이 떼로 몰려 갔으니 명사십리 해변이 온통 우리 것인양 신나게 놀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일이 생겼다. 친구 가운데 현지의 또래 아이들과 시비가 붙은 것이다. 난 술이 얼큰하여 텐트 안에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친구 하나가 날 흔들어 깨운다.


"형님, 형님, 일어나세요."


아니, 형님이라니? 평소라면 절대 나에게 형님이라고 할리가 없다. 그런데 내게 형님이라고? 잠결에 이상하게 생각하며 일어났더니 오리려 더 큰 목소리로 날 텐트 밖으로 불러 낸다.  텐트 밖으로 나갔더니 명사십리 인근 마을 또래 청년들과 시비가 붙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난 나이가 내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인다. 동네 청년들과 시비가 붙자 날 형님이라고 하면서 불러 내어 무마시키려고 한 것이다.


난 잠결에 얼결에 나왔다가 졸지에 해결사가 된 셈이었다.
그 마을 청년들 앞으로 가면서 제법 나이든 사람인양 하며 무마를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흥분한 그들의 눈에 몇 살 더 나이들어 보인다고 하여 나의 말이 먹혀 들어갈리가 없다. 내 친구들은 나를 앞세워두고 모두 뒤로 물러섰고 내가 앞으로 나서자 그들은 나를 에워 싸더니 사방에서 주먹으로 치고 발길질을 하고, 난 그 몰매를 견뎌야 했다. 겉보기엔 굳건한 척 입으로는 너희들 혼날줄 알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었다.


맷집이라는 게 과연 있긴 있는 것 같다.
난 그들과 함께 주먹질 발길질을 하지 않고 모두 맞으면서 그 중 한 청년의 허리춤을 붙잡고 버티었다.

만약 쓰러지면 짓밟히게 될 것이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마을 청년들이 요즘 말하는 조폭이거나 깡패들이 아닌 순진한 마을 청년들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가


"응, 이 놈은 한가락 하네~"


하면서 뒷걸음을 치자 모두들 슬슬 뒤로 물러나더니 내게 허리춤을 붙잡힌 제 친구도 둔채 우르르 도망을 쳐 버린다. 그렇게 해서 해결사 노릇을 제대로 하긴 했지만 우리 친구들은 그녀석들이 또 떼로 몰려 올까봐 겁이 났다. 그래서 내일 아침에 육지로 나가기로 하였다. 겁이나서 섬에 머무르고 있을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첫 배를 타고 육지로 나왔다. 육지라고 해봐야 완도이니 역시 섬이다. 그러나 완도에서 배타고 10여분을 가야 닿은 신지도라는 섬보다는 완도라는 큰 섬이 훨씬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해수욕하려고 온 10여명의 친구들로서는 갈 곳이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주민들에게 물어 물어 찾아간 곳이 완도읍에서 별로 멀지 않는 정도리의 구계등 몽돌해변이었다.


차는 없었다. 완도항에서 정도리 까지는 제법 먼 거리였지만 당시로선 그 정도 거리를 걷는 것은 당연하였다.
배에서 내린 우리는 짐을 바리바리 들고 걸어서 정도리로 향하였다. 거기서 처음 몽돌해수욕장을 만났다. 자갈돌 같이 작은 몽돌부터 바윗덩이 같이 큰 몽돌이 해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몽돌해변과 붙은 숲에 텐트를 치고 몽돌이 파도에 쓸려 자그락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바다에 뛰어 들었다.


해변에는 천일염이 아닌 제제염 공장이 있었다. 바닷물을 끓어 들여 끓여서 소금을 만드는 공장이었는데 태풍이 불어 큰 파도가 몰려오면 공장을 덥칠 기세로 산더미 같은 파도가 밀려 온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큰 파도도 바닷가에 이르면 기세를 잃게 되어 그런일은 없다고 하였다. 오히려 게세게 밀려온 파도가 흐트러진 몽돌들은 크기 순으로 정열하여 준다고 하였다.
  그 때 생각에 그 모습이 한 번 보고 싶었다. 거세게 밀려오는 파도와 그 파도에 휩쓸려 가지런히 정열되는 몽돌해변을 보고 싶었다. 그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태풍이 불어 거센 파도가 밀려오는 해변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실행하지 못하였다.
올해는 태풍이 불면 제백사하고 해변으로 달려 가볼까?
멀리 완도 정도리 구계등 몽돌해변 까지 갈 수 없으면 가까운 어느 바닷가라도 찾아 가볼까?

 

               <완도 정도리 구계등 몽돌해변. 태풍이 불어 큰 파도가 오면 몽돌을 크기순으로 잘 정열하여 준다.>

 

 

여름이 끝나간다.

이젠 나도 피서를 가야하겠다. 아니 더위가 다 지나고 무슨 피서? 사람이 많고 차가 많을 때 가는 것보다 조금 한가하여진 지금쯤이 아직 더위도 남아 있고 피서지에 상인들도 남아 있는데다 혼잡하지 않아 좋다.

 

슬픔은 슬픈채 끝내지 말고 추억은 아름답게 묻으라 하였다.

오늘은 완도 명사십리와 정도리 몽돌해변에 묻은 나의 아름답운 추억을 찾아 보았다.

완도는 멀다. 멀지만 추억이 묻혀 있다. 언젠가는 그곳을 다시 찾아가 아름다움에 잠길 것이다.

(흐르는 노래는 여름노래 15곡 입니다. 끊이지 않고 종일 연주 됩니다. 곡명, 연주기가 필요한 분은 댓글로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완도에 있는 청산도와 보길도는 전국에 이름을 날리고 있다.
그런데 신지도 명사십리 해수욕장과 정도리 구계등 몽돌 해수욕장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산좋고 물좋은 우리의 나라다. 봄여름 갈겨울 살기도 좋은 우리나라다.
완도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섬 보길도, 청산도, 신지도 그리고 완도항에서 멀지 않은 정도리 구계등 몽돌해변과 청해진 장보고 유적지 장도도 가서 보면 과연 우리나라가 좋은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제법 멀리 떨어진 윤선도의 어부사시사가 전하는 보길도에 까지 가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밝 누 리.

[밝은 우리의 온 삶터]

-밝은 밝음이며, 온은 따뜻함(溫)이고 모두(全 온통)이며, 누리는 살아가는 세상이고 살아가는 역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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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새로운 기술. 3~5만원대의 손가락 컴퓨터.. 5G 홀로그래피 일반화...

2015년 부터는 유사 홀로그래피 서비스 시작. 2020년이 지나면 5G 홀로그래피 본격화

 

 

손가락 컴퓨터가 3~5만원대에 판매되고 있다.
통신기능을 뺀 스마트폰 형태의 손안의 컴퓨터가 3~22만원대에 팔리고 있다.
SMS(문자 메세지 서비스)를 지나 MMS(멀티미디어 메세지 서비스)를 지나  비디오 메세징(* VMS? 비디오
메세지 서비스) 서비스가 시작 되었다.
2015년 부터는 유사 홀로그래피 서비스가 시작된다.
2020년이 지나면 5G 홀로그래피가 본격화 되어 각종 모바일 기기에서 이용할 수 있다.


얼마나 뛰어 쫒아가야할까?
그래도 뛰지 않을 수 없다. 부지런히 뛰어야 하겠다. 휴대폰에서 내 아이가 나와 나랑 이야기할 수 있는 그때까
지...
( * 비디오 메세징. VMS, 비디오 메세지 서비스는 MMS와 대응하여 필자가 만들어 본 말로 일반화된 용어가 아님. 비디오 메세징이란 말은 지금 쓰이고 있음)

 


  스마트폰은 손안의 컴퓨터다.
거기서 통신 기능을 빼면 값을 많이 내릴 수 있다. 그렇다고 통신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무선인터넷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스마트폰'이 아니라 '스마트컴(?)'이라고 이름을 붙여야 할까?


스마트컴은 아니지만 3~5만원대의 컴퓨터가 국내에 개발되어 판매되고 있다.
성인 엄지손가락 크기의 초소형 PC.. 여기에 모니터와 키보드를 연결하면 컴퓨터가 된다.

 

2만원 대 컴퓨터.. 스마트폰도 무거워!…'손가락 PC' 시대 성큼 <== 클릭   http://me2.do/GnZAv9EM
  - 주머니에 본체 넣고 다니다 모니터·키보드와 연결
  - 아이큐브·앱센터 시제품 공개…상용화땐 2만원대 가능 

 

< 사진. 위: HDMI USB 마이크로USB 등의 단자가 달린 초소형 PC 회로기판(왼쪽). 상용화를 위해 명함 크기로 제작했다. 초소형 PC에 케이스를 씌워 제품 형태(오른쪽)로 만들었다. 앱센터 제공 >
< 사진. 가운데: 국내 벤처기업 아이큐브는 앱센터와 함께 최근 성인 엄지손가락 크기의 초소형 PC를 선보였다. 앱센터 제공 >

< 사진. 아래: 제조사별 '손안의 PC' 사양 및 OS와 가격, 특징 등을 살펴 보았다.  >

 


  ‘손안의 PC’ 시대가 열릴까. 고급 스마트폰 얘기가 아니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초소형·초저가 PC가 주목받고 있다. 사람 손가락 크기에 불과하지만 모니터와 키보드, 마우스를 연결할 수 있고 무선랜을 잡아 인터넷을 사용할 수도 있다. 이 PC를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다가 공공장소에서 모니터 키보드 등 주변기기와 연결해 자신만의 PC로 이용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국내외에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초소형 PC가 보급형 PC의 한 형태로 자리잡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엄지손가락 크기의 컴퓨터
    셋톱박스 전문 벤처기업인 ‘아이큐브’는 사단법인 앱센터와 손잡고 어른 엄지손가락 크기의 초소형 ‘손가락 PC’ 시제품을 최근 내놨다. 길이 7.7㎝, 폭 2.5㎝에 불과하지만 모니터와 연결할 수 있는 HDMI 단자, USB와 마이크로USB 단자 등 갖출 건 다 갖췄다.


  가벼운 안드로이드 운영체제(OS·젤리빈)를 탑재해 모니터 키보드 마우스만 있으면 어디서든 자신만의 컴퓨터로 이용할 수 있다. 625메가헤르츠(㎒) 프로세서와 512메가바이트(MB) 램, 4기가바이트(GB)의 저장공간을 갖춘 이 제품은 제조원가가 3만5000~4만원 정도다. 앞으로 상용화되면 제품 가격은 2만원대까지 낮출 수 있을 것으로 앱센터와 아이큐브는 보고 있다.


크기는 '깜찍'…가격은 '깜짝'. 성큼 다가온 초소형 PC시대.. 3~22만원 가격대 부담없고...
    * 침체된 PC 시장에 `초소형·초저가` 바람 분다 <== 클릭   http://me2.do/5leuxKNE

문자대신 동영상으로…비디오메세징이 뜬다. 그리드ㆍ핑거 등 서비스
    * 글씨 입력 귀찮아? 난 동영상으로 메시징한다. <== 클릭   http://me2.do/Gw0GITGq
    멀티미디어메세지(MMS)를 대신해 짧은 비디오를 보내는 비디오메세지서비스가 확산 중이다.

 

 

엄지손가락 크기부터 스마트폰 크기 까지 다양하고 값은 싸지만 할 일은 다 한다.
인터넷을 할 수 있고, 음악을 들을 수 있으며, 영화와 같은 동영상을 볼 수 있고, 컴퓨터로 하는 일은 모두 할 수 있다.  장래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지금 당장 그렇다는 것이다. 눈앞에 당장 가능하다.


전자책 단말기도 역할을 한다. 최근 대형 온·오프라인 서점들이 전자책 단말기를 경쟁적으로 내놓았다. 예스24·알라딘·영풍문고 등 주요 인터넷 서점과 출판사가 연합해 만든 한국이퍼브는 어두운 곳에서도 전자책을 읽을 수 있는 프런트 라이트가 들어간 `크레마샤인`을 이달 초 선보였다. 인터파크는 안드로이드 젤리빈4.2 기반 7인치 스마트패드 전자책 단말기 `비스킷탭`을 이달 중순 출시했다. 교보문고는 지난 2월 회원제 전자책 서비스 `샘(sam)`을 선보였다. 교보문고는 지난달 기준으로 누적 회원 수 1만5000명을 돌파했다고 밝혔다.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아직 전자책 단말기가 활성화 되지 않고 있다. 나도 사려고 하였으나 첫째 화면이 너무 적고 둘째 흑백인데다 셋째 디지털저작권관리(DRM) 호환이 잘 되지 않아 예스24 등 전자책 업체가 판매하는 콘텐츠의 DRM이 달라서 호환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패드, 갤럭시 패드나 아이패드와 같은 형태의 7인치 컬러 전자책을 판매하기 시작한 업체가 있다.


인터파크, 한국형 킨들파이어 `비스킷 탭` 출시 <== 클릭   http://me2.do/542gxNRh


   전자책 단말기가 패드의 형태가 되어 컬러로 와이파이를 이용하여 인터넷을 할 수 있고, 음악 감상은 론이고, 영화 등의 동영상까지 감상 할 수 있다면 바로 컴퓨터이다. 판매가가 16만9,000원이어서 저렴고 대부분 유료이지만 판매사가 보유한 전자책 컨텐츠를 1만 2천권이나 저장할 수 있다니 이만하면 지 않았는가?  또한 인터파크에서 이런 단말기를 팔기 시작하였으니 교보 등 다른 업체들도 멀지않아 슷한 성능과 가격의 단말기를 판매할 것이니 고르는 맛도 있겠다.


 

        < 컬러이고 7인치 화면인데다 패드형태여서 손안의 컴퓨터로 쓸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전자책 단말기...>

 

 

 

컴퓨터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젠 휴대폰에 대하여 이야기하여 보자.
2세대, 3세대, 4세대를 가각 2G 3G 4G라고 부른다. 지금은 원시 4G에서 본격 4G시대로 접어 들었다.

LTE-A가 그것이다. 이 LTE폰 만으로도 VMS(?)가 가능하다.


지금 통신은 3G(쓰리지)에서 4G(포지)로 넘어 왔다.
난 아직도 2G(투지.2세대) 휴대폰을 사용하고 있지만 2020년을 목표로 5G(파이브지 5세대 통신) 개발이 한창이다.  벌써 5G 기술이 하나씩 개발되어 축적 되고 있다. 비디오메세징서비스(VMS)는 손가락컴퓨터로도 스마트폰으로도 통신 기능을뺀 스마트컴으로도 이미 가능하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은 5G에서 홀로그래피를 구현하는 것이다.

 

휴대폰이 울려서 받은 다음 홀로그래피를 실행하면 내 아이가 허공에 작은인형처럼 나타나 노래를 부른다.
물론 현장의 생생한 음향과 함께 노래를 듣는다. 입체영상이라고 하지만 컴퓨터나 TV에서 지금 서비스하는 3D 이입체영상과는 다르다. 허공에 뜬 실물과 같은 영상을 360도 돌려가며 볼 수 있다. 처음엔 앞(정면)에서 내 아이의 모습을 본다. 다음은 옆(측면)에서 같은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본다. 그 다음엔 뒤에서 보고 마음 내키면 뱅뱅 돌게하여 앞, 옆, 뒤, 왼쪽, 오른쪽에서 자유자재로 본다.


이렇게 360도 회전이 가능한 입체 동영상을 문자메세지(SMS) 처럼 비디오이미징으로 받아서 생동감 있게 본다. 더 나아가 홀로그래피로 영상통화를 한다. 우리집 거실이 눈 앞에 나타타고 내 아이가 나타나 나와 대화를 한다. 5G 홀로그래피로 영상통화를 하면 이런일이 가능하다. 더 발전하면 실물크기의 홀로그래피 입체 영상을 상대로 통화할 수 있다.


SMS(문자메세지)에서 MMS(멀티미디어 메세지)에 이어 비디오 메세징(VMS?)에 이르렀고 머지 않아 홀로그래피 메세지와 통화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까지 일반화하게 되는 것이다.


홀로그램과 홀로그래피란 말은 몇 차례 들었다 해도 생소하다.
나는 서울 과천의 어린이 대공원에서 스크린이 없는 허공에 영상이 나타나는 홀로그램을 보긴했다. 하지만 다른데서는 홀로그래피거나 홀로그램이거나 이렇게 허공에 입체영상이 나타나는 것을 본 기억이 없고 더우기 입체동영상이 나타나는 것은 보지 못했고 그럴 수 있으리라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비데오 메세징(VMS?)를 지나 '홀로그래피 메세징 서비스'를 하게 되면 'HMS(?)'라고 하게 될까? 또 홀로그래피로 통화하게 되면 '5G 홀로그래피 통신'이라고 하는 것일까?

 

그런데 5G 시대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은 홀로그래피를 휴대폰에서 구현하고 나아가 일상생활에 일반화 하는 것이라니 놀랍기 그지 없다. 여기저기에 홀로그래피에 의한 360도 입체 동영상이 나타나는 사회의 모습은 어떻게 바뀔까?

 

5G 홀로그래피…눈앞에 그녀를 불러냈다.
    * 홀로그래피는 360도 입체영상을 구현하는 기술 <== 클릭   http://me2.do/Gss8j32Z
  무선으로 기가급 대용량 콘텐츠 전송하고 스마트폰 등 단말서 3D 이상의 영상 즐기게 된다.
홀로그래피는 360도 입체영상을 구현하는 기술이다. 두 눈의 시차를 이용한 현재 3D 영상 기술보다 훨씬 현실감 있는 콘텐츠를 전달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2015년 부터 유사 홀로그래피 서비스가 시작되고 2020년이 지나면 각종 모바일 기기에서 홀로그래피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측한다.
- 전자신문 기사 인용 -

 

 

1960년대 국민학교 다닐 때 책이 퍽 귀했다.
소년동아일보 소년한국일보 등이 책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는 역할을 했다. 여기에서 삼국지 서유기(손오공) 수호지 홍길동 임꺽정 등 우리나라와 동양의 고전과 함께 장발쟝이나 괴도 루팡 등 서양의 고전이나 추리소설도  보았었다. 쥴베르느(*)의 80일간의 세계일주도 보았고 해저 2만리도 보았고 달나라 탐험도 보았다.

  달나라 탐험은 사람이 탄 대포를 쏘아 달을 한 바퀴 돌아 지구로 돌아오는 이야기인데 오늘날로 말하아폴로 우주선이나 우주왕복선을 연상케하여서 놀랐었다. 쥴베르느? 하도 오랜만에 생각하는 이름이서 맞을까 싶어 인터넷 검색을 하여 보니 척 나타난다.

( * 쥴베르느. Jules Verne 프랑스 발음 '쥘 베른'. 프랑스의 과학소설가. 1869년 《달나라 탐험》발표. 《15소년 표류기》《해저 2만리》등 여러편의 공상과학소설 저술  - 위키백과에서 일부 인용 -)


1960년대만 해도 해저 2만리나 달나라 여행은 사람이 이루지 못할 일로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모두 이루어졌다. 5G 홀로그래피가 일반화 되어 어디서나 눈앞에 실물크기의 홀로그래피 입체영상으로 통신은 말할 것도 없고 전시 공연 콘퍼런스 엔터테인먼트(게임ㆍ영화) 등을 구현할 날이 멀지 않았다.
쥴베르느 조차 생각지 못하였을 5G 통신 시대가 멀지 않아 열리는 것이다.

 

 

 


  컴퓨터. 날마다 무섭게 발전한다.
새로운 기술이 빠른 속도로 개발 되고 또 없어진다.
3~5만원대의 손가락 컴퓨터가 우리나라에서도 판매되기 시작하였다.
스마트폰에서 폰 기능을 뺀 스마트컴(?)이 20만원 이하로 판매되기 시작하였다.
더하여 비디오 메세징(VMS?)이 시작 되었다. SMS에 이어 MMS를 지나 VMS(?)시대에 이른 것이다.
뿐만 아니다. LTE-A라 하여 본격 4G세대가 열린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5G 홀로그래피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홀로그래피? 휴대폰에 홀로그래피 기능이 포함되어 통화와 메세지를 홀로그래피로 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뛰어 쫒아가야할까?
그래도 뛰지 않을 수 없다. 부지런히 뛰어야 하겠다. 휴대폰에서 내 아이가 나와 나랑 이야기할 수 있는 그때까
지...

 


 










.밝 누 리.

[밝은 우리의 온 삶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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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중百中. 父母恩重의날.. 

 

 

  백중百中. 음력 07.15. 이젠 잊혀졌다고 해야 할 백중날이 오늘(2013.08.21 수요일)이다.
우리에겐 05월에 어린이날과 함께 어버이날이 있다. 백중百中이 또한 부모은중(父母恩重)의 날로 오랜 우리의
어버이날이다.
  05.08로 어버이날이 따로 지어져 있지만 사실 우리는 백중날을 이미 어버이날로 지켜온 것이다.
어버이날이 어찌 따로 있겠는가? 나는 생일을 부모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날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일은
축하 보다는 부모님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은혜를 기리는 "어버이날"로 해야 한다는 것이 평소 저의 지론이다.

 

      < 백중百中놀이. 위는 밀양. 아래는 연산. 지금까지 이런 행사가 밀양이나 연산에 남아 있다니 가서 함께 즐기고 싶다. >


잊혀지는 것들이 많다.
백중만 해도 그렇다. 어렸을 적엔 우리 집에서도 백중차례를 지냈다. 백중은 여러가지 이름이 있지만 머슴노는날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1960년대 초, 우리집엔 머슴이 없었지만 시골에 사는 큰집과 작은집엘 가면 머슴이 있었고 언젠가 시골에서 백중을 맞으면서 보니 머슴들이 모여 먹고 마시며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백중무렵이면 농삿일을 잠시 쉴 수 있다.
벼 이삭이 패고, 콩이 꽃을 피우고, 과일밭엔 과수가 익어가고, 풀매기나 거름주기나 논밭에 들면 오히려 열매 맺는데 해가 될 때가 이 때쯤이다. 그러니 농업사회였던 우리의 농민들이 하루를 풋풋하게 즐길 수 있는 때가 백중무렵이다.


백중기도 백중사리
이런 말들도 잊혀져 간다. 더불어 영가천도(靈駕遷度)란 말은 흔적도 없다. 종교는 신을 믿기 이전에 풍속이라는 학자가 있다.  백중은 유교 그리고 불교와 연원이 깊다. 이 것을 종교 관점에서 배척한다면 결국 우리의 미풍양속을 짓밟고 배척하는 것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백중이면 기도를 하고 천도제를 지냈다.
물론 부모를 위해 또 조상을 위해 기도를 하고 제를 올린 것이다. 또한 여름 더위를 힘들게 이겨낸 부모님을 업고 산천을 살피며 위로하였다. 그래서 백중날은 머슴의 날이고 농민의 날이면서 아울러 어버이날 부모은중父母恩重의 날이었던 것이다. 

 

                                   < 백중날 부모를 업고 산천을 주유함은 우리의 풍속이었다. >


  생일은 부모은중父母恩重의 날이어야 한다.
아이때부터 부모들이 귀엽고 예쁘다고, 케익이다, 파티다, 혼자 절로 낳고 큰줄 알게 키우는 우리의 현실이 아름답지 못하다는 생각을 한다.  생일날, 아이들이 있는 분이라면, 그 앞에서, 부모님의 은혜를 기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큰 교육이 된다고 생각한다. 생일을 맞으면 부모님께 효친하는 모습을 더욱 보여줘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만일...


      부모님을 모시고 산다면, 더욱 효친을 다 할것이요.
      부모님이 멀리 계신다면, 될수 있으면 찾아뵙고 만일 어렵다면 전화나 편지등 여타 방법으로 효친 할것이요.
      부모님이 돌아 가셨다면, 산소를 찾거나, 어려우면 사진첩이나 육성 녹음, 유품 등으로라도,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날"이 바로 생일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의 생일도 그렇다. 파티를 열어주고, 선물을 사주고, 친구들을 불러 잔치를 하여주고 하는데 이런 풍조가 결국 청소년이 되고 어른이 되어서도 오직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려 할 뿐, 잠시라도 효친의 마음을 가지려는 여유를 가질 수 없게할 것이니 안타까운 일이다.


생일잔치, 조그만 애들을 불러모아 파티를 하여주면서 무슨 교육인가?
생일은 조상의 은혜에 감사하는 날, 할아버지 증조,고조 할아버지가 누구시며 어떤일을 하셨는지, 산소는 어디에 있는지 그런것을 가르치고 부모의 낳아준 은혜를 기리는 날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왕자와 공주, 왕과 여왕만 길러내서는 이나라의 장래가 밝지 않을 것이다.
돈을 많이 벌어라, 수단방법 가릴것 없다. 그러나 누구에게든 피해는 주지 말아라, 새치기 사재기 투기 뇌물주기 모두 이웃에 피해를 주는 행위이다.
  생일잔치는 왕자나 공주로서가 아니라  미쟁이 땜쟁이 연탄상수 미나리장수 벽돌공 말단공무원의 자식으로서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효친의 날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생일은 조상을 은중(恩重)하는 날이라야 한다.
왕자나 공주로 자라난 아이들은 자라서 왕이나 여왕으로 살아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네 아버지는 이런 사람이다. 네 조부모는 이런 분이다." 만일 조부모나 증조부모가 살아 계신다면 의당 낳아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찾아 뵙거나 그러지 못 할 처지라면 전화라도 드려 은혜에 감사하고 만일 돌아가신 후라면 산소는 어디에 있고 이런일을 하셨다며 산소를 찾아 성묘하도록 하고 여의치 않다면 사진이라도 보는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왕자나 공주만 키워내는 가정, 박사나 전문가만을 키워내는 학교...
아이들을, 자기의 후손들을 자본주의 사회에 살아가면서 돈을 가볍게 알거나 생활력이남보다 뒤진 사람으로  길러 서는 안 된다. 하지만, 최소한 남에게 피해를 주지않고 스스로가 왕자나 공주 혹은 선택된 인간이 아니고 그저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하여야 할 것이다.

 

 

아랫글은 1996.07.10 어느 게시판에 생일날은 잔치를 벌리는 날이 아니라 부모님 은혜를 기리는 날이어야 한다는 것을 올렸던 글이다.    백중날을 맞아, 부모와 조상을 위한 효친의 마음으로 백중기도를 하고 영가천도靈駕遷度를 하던 우리의 옛 풍습을 살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글을 여기에 옮겼다.

(필명이 일정으로 되어 있는 것은 당시 내가 일정一丁을 호로 사용하였기 때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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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감사] 생일은 부모님의 은혜를 기리는 날!              작성자 나일정  작성일 96/07/10 02:43 조회 50

 
    안녕 하세요?
  올 여름이 무덥고 길다더니만 아직 까지는 장마라하나 큰 물난리 없이
  지내어 왔는데 마침 요즘 몇일간 아주 쾌청한 날씨를 보여 생활하기가
  조금은 여유롭군요.


    저의 생일을 축하하여 주신 여러분께 감사 드립니다.
  더구나 생일이 음력인데 양력으로 금빛촌에 공지되는 바람에 어떤분은
  2번씩 메일을 내어 주셨고 또 어떤분 게시판에도 2회씩 축하의글을
  보내 주시기도 하셨고...


  제가, 지난 5월에 생일 축하를 하여주신분들께는 아무런 감사의 말씀도
  없이 지내었는데, 음력 생일이 다시 돌아오는 관계로 지금 한번에 감사
  의 인사를 드립니다.


    제가 간혹 게시판에 피력하여 왔지만...
  생일은 결코 자축하는 날이 되어서는 않되겠다는 것입니다.


  생일은 낳아주시고 길러주셔서 자신을 있게 하여주신 부모님은 은혜에
  감사하고 그 은혜를 기리는 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만일...


      부모님을 모시고 산다면, 더욱 효친을 다 할것이요.
      부모님이 멀리 계신다면, 될수 있으면 찾아뵙고 만일 어렵더라도 전
                              화나 편지등 여타 방법으로 효친 할것이요
      부모님이 돌아 가셨다면, 산소를 찾거나, 어려우면 사진첩이나 육성
                              녹음, 유품 등으로라도,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날"이 바로 생일이라고 생각 합니다.


  요즘 부모들이 아이들의 생일 파티를 열어주고, 선물을 사주고 하는데
  이런 풍조가 결국 청소년이 되고 어른이 되어서도 오직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려 할뿐, 잠시간이라도 효친의 마음을 가지려는 조금의 여유도
  없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의 생일을 축하하여 주신 여러분께 다시한번 감사 드리며...
    저 혼자 만이라도 생일을 맞아 효친의 마음을 키우려는 다짐을
    합니다.

 

                          .일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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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13.08.21 수요일)이 백중날이다.
우리 풍습에 백중날은 부모은중父母恩重의 날이었다. 백중날을 어버이날과 함께 또 다른 어버이날로 지정하였
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을 것같다. 그렇다 하더라도 풍속을 어쩌겠는가? 백중날이면 효친을 실행하였으면 겠다.  그리고 생일을 맞으면 낳아주고 길러주신 은혜를 감사하는 날로 하였으면 좋겠다.
  우리의 아이들은 모두 왕자 아니면 공주이며 장래에는 왕과 여왕이 된다는 전제하에 자라고 있다.
생일 잔치를 보라. 생일은 부모은중의 날이 되어 자기를 낳아주신 부모와 조상의 은덕에 감사하는 날이 되어야
할텐데 유치원도 다니기 전부터 온통 축하파티를 열어주니 아이들은 스스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왕자나 공주가 되고 마는 것이다.
  아이를 가르칠때는 스스로의 분수를 알도록하고 특히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위에 피해를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여야 할 것이다.  생일을 효친하는 날로 하면 우리의 아이들은 분수를 알고 노력하는 사람으로 커 갈 가능성이 훨씬 늘어날 것이다.

 


 

 

 










.밝 누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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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면.. 제대로 먹는 법...

 

 

  여름이 간다. 오늘(2013.08.19 월요일) 새벽에 산책을 나가보니 성급하게 제법 가을의 기운이 느껴졌다.
벼 이삭이 패기 시작하였다. 처서가 23일 이니 가을이 성큼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가로늦게 여름 별미인 냉면
을 이야기한다. 여름이 아니어도 냉면을 먹지 못할 것도 없지만 역시 냉면은 여름에 먹는 것이 제격이다.
  여름엔 보양식을 먹는다. 냉면이 보양식일까? 별미라면 몰라도 냉면이 보양식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여름 별미도 여러가지가 있지만 냉면은 단연 빠질 수 없는 음식이다. 난 올(2013년) 여름에도 여러차례 냉면을
먹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내가 냉면을 먹는 것은 제대로 먹는 것이 아니었다.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냉면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통평양냉면. 함흥냉면이나 다른 지방의 냉면은 그렇지 않을까?
인공난(人共亂 6.25사변) 때 각지로 흩어진 평안도 피난민 중에 냉면집을 시작한 사람들이 생겼고 부산에서는 밀가루로 빚은 밀면이라는 음식이 나타나기도 했는데 실향민들의 모임 장소는 으례 냉면집이었다고 한다. 그 피난민 1세대가 냉면 제대로 먹는 법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냉면은 모름지기 나온 그대로 먹어야 한다. 냉면에 쇠를 대면 맛이 달라진다. 국물에 겨자와 식초도 치지 마라. 식당의 내공인 육수는 그대로 즐기는 것이다. 달걀은 가장 나중에 먹어라. 음식을 다 먹고 입을 깨끗하게 청소하면서 양념냄새를 없애는데 제격이다."
                                                                              - 이코노미스트 2013.8/12 1199 여름 합본호 1쪽 에서 인용 -

 

                                          < 냉면.. 원래는 북한에서 겨울 간식이었다고 한다 >


아니!!  그렇단 말인가?
난 냉면을 먹으면서 다른 것은 몰라도 우선 가위부터 찾아서 면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랐는데 그렇단 말인가? 냉면의 원조 평안도에서 온 피난민 1세가 남긴 말이라니 믿지 않을 수 없다.


* 주간 경제지 이코노미스트
  '냉면 한 그릇 속 근대사' 김경준 딜로이트컨설팅 대표의 글  <== 클릭   http://me2.do/FgCd9N4X
   ( 주간 이코노미스트  정기구독자가 아닐경우 일부만 읽을 수 있으므로 필자가 기사의 글을 인용하였음 )


위 주간지를 1년간 정기구독하여 읽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위 냉면 관련 글을 읽으면서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하나는 냉면이 원래는 겨울에 먹는 겨울냉면이었다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겨울에 꿩고기 냉면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두 번째는 냉면이 여름음식으로 된 이유가 냉장고와 조미료가 일반화 되어 얼음을 맘대로 쓸 수 있고 조미료를 써서 값싸게 맛을 낼 수 있게 되어서라는 것이다. 난 그런줄 모르고 냉면은 당연히 여름에 시원한 얼음을 곁들여 먹는 것으로 알았다.


위 냉면 제대로 먹는 법은 피난민 2세대로 주간 이코노미스트에 글을 올린 필자(김경준 딜로이트컨설팅대표)의 아버지가 먹기 하게 잘라 달라는 옆 테이블의 손민을 보면서 하신 말씀이라고 한다.

는 냉면을 제대로 즐길 있게 되었다.


얼마전 여기에 ' "남자가 무슨 그런 옷을 입어!".. "남자는 역시 검은 옷을 입어야 멋져~ "(2013.06.24 월요일)'올리면서 글의 끝 부분에 냉면에 대하여 썼었다.
  이 노래는 미국의 가곡이 우리의 시골장터 냉면집을 노래하는 것으로 편곡 되었지만 마치 우리 민요같은 느낌이 들어 낮설지 않은데다, 노래의 가사를 보더라도 냉면은 서민이 장거리에서 흔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음이 분명하다.


* 유튜브.  냉면 - 강병철과 삼태기 <== 클릭   http://youtu.be/eGYbxAGMrx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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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 면
                                       가곡, 미국 비블 라 콤파니〉(Vive la Compagnie)
                                       작곡가 박태준이 편곡한 후 가사를 붙임


♪ ♬ ~ 1. 한촌사람 하루는 성내와서 구경을 하는데
              이골 - 목 저골목 다니면서 별별 것 보았네


              후렴:
              맛좋은 냉면이 여기있소 값싸고 달콤한 냉면이요
              냉면 국물 더 주시오 아이구나 맛좋다 ~
              냉~~면 냉~~면                                 
<------------ 이 부분은 아무래도 원곡에는 없고 우리민요 장국

              물냉면에 불냉면에 비빔냉면 회냉면                  |        타령에서 "강병철과 삼태기"가 노래를 재미있게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산답니다---               
----- 하기 위해 붙여 넣었지 않을까 생각 된다.


          2. 이촌바위 혹하여 들어가서 냉면을 시켰네
             한참이나 맛있게 잘먹다가 재체기 나왔네


          3. 한오라기 코구멍에 나오는 것 손으로 빼냈네
             또나온다 줄줄줄 또 빼낸다 아직도 빼낸다. ~ ♬ ♪


* 냉면/김치경 노래  <== 클릭. 노래를 들으세요.   http://me2.do/F547odXA
   ( 다음의 개인블로그에 있는 동요를 주로 부르는 김치경의 노래는 위 노래와 분위기가 좀 다르지만... )

 

 

 


냉면 제대로 먹기.
앞으로는 냉면이 나오면 가위로 자르지 않고, 조미료를 첨가하지 않고, 자르지 않은 면과 내공이 실린 육수의
맛을 제대로 즐겨야 하겠다. 올해는 9월 말까지 덥다니 앞으로 몇 번은 더 먹을 기회가 있겠다. 그리고 겨울 간식으로 즐긴 겨울 냉면도 올 겨울이 오면 즐겨봐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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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2) 외할머니, 상사화, 나리꽃, 도라지꽃, 메꽃...

 


* 여름(1) 외할머니. 깨, 김장배추, 무, 알타리, 고구마,봉숭아..

* 여름(2) 외할머니, 상사화, 나리꽃, 도라지꽃, 메꽃...


  외할머니.
노랫말에 '외할머니'가 들어간 노래가 있다. 난 할아버지 할머니는 안 계셨고 오직 한 분 외할머니가 날 퍽 예
뻐하셨던 기억만 있는데 노랫말에 '할머니'가 들어간 노래도 거의 없지만 '외할머니'가 들어간 노래는 아예 없다고 생각 된다. 그런데 제목 미상의 도라지꽃과 나리꽃을 부른 노래의 노랫말에 '외할머니'가 들어간다.
  어제에 이어 두 번째 이 글을 쓰는 오늘(2013.08.13 화요일)은 칠석날이다. 아이와 저녁에 비오는지 보자 견
우와 직녀가 만나 눈물을 흘리면 비가 된다는 것 알지? 여섯 살 아이가 뭘 알아선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상사화相思花라는 꽃이 견우 직녀 보다 더 힘들게 상사相思하는 것 같다.
(이 글은 어제(2013.08.12 월)에 이어 두번 째 텃밭에서 있었던 일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 텃밭에 도라지 나리 상사화 더덕꽃 등이 피어 있다.
그런데 상사화가 피어나 화사하다. 오늘이 칠석날이어서 상사화相思花 이야기가 더욱 새롭다. 꽃이 필 때는 잎이 없고, 잎이 자랄 때는 꽃이 피지 않아 서로 볼 수 없어 그리워 한다하여 상사화相思花라고 한단다. 견우와 직녀는 칠석날 오작교를 건너 만나서 눈물을 뿌릴 수 있는데 그도 못하니 가히 가슴아픈 그리움일 수 밖에 없겠다.

 

< 상사화相思花 우리나라가 원산지이고 피부질환에 쓰이는 약용식물인데 잎과 꽃이 서로 만날 수 없어서.. >


상사화 사진을 보니 과연 꽃은 있는데 잎이 없다. 왜 꽃필때면 잎이 다 스러지는 것일까? 살갗에 돋는 물집을 없애고 옴이나 악성종기를 치료하는 약용식물이라는데 이 꽃이 우리 텃밭의 한구석에 피는 이유를 나는 모른다. 분명 우리식구 가운데는 심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어난 꽃이 8~9월 염천을 빛내니 반기지 않을 수 없고, 오늘 같은 칠석날에는 이야기거리가 하나 더하여 진다.

 


지난해 도라지꽃과 메꽃을 소재로 글을 쓴 적이 있다.
지금 우리 텃밭에는 도라지꽃이, 울타리 주변에는 나리꽃이 한창이다. 꽃을 아주 곱고 예쁘고 멋있게 사진으로 찍으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야 안다. 도라지꽃이 한꺼번에 피었다 지는 게 아니라 피어선 지기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찍은 사진의 도라지꽃은 시들어 말라붙은 꽃과 그 꽃이 맺혀 씨봉우리리가 맺힌 것과 새로 피어나는 꽃이 함께 찍혔다. 그러니 아주 깨끗하고 꽃만 찍은 사진과 다르지만 난 이렇게 꾸미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찍은 사진도 나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텃밭 한쪽의 도라지꽃. 언제 까지 필지 모르지만 피어서 지는데다 가지가 쓰러져 흐트러진 모습으로 아름답다. >
< 빗속에 더덕과 섞여서 핀 도라지꽃. 더덕꽃도 피었는데 이 사진을 찍은 지난 일요일(08.11) 비가 와서 못 찍었다. >


도라지꽃을 볼때면 그리고 마침 함께 피어나는 나리꽃을 볼때면 아이랑 함께 노래를 부른다.
"나들이 옷 갈아 입고 외할머니 댁에 갈때면~" 나들이가 무엇인지 외할머니가 무엇인지 묻는 것을 가르쳐 주었더니 몇 번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잘 부르고, 자주 내게 불러 달라고 하고, 노래를 좋아한다.


       제목: 미상


도라지꽃은 보라빛 언니가 좋아하던 꽃..
나리꽃은 빨간빛 내가 좋아하는 꽃..
언니는 보라빛 저고리 나는 다홍치마..
나들이 옷 갈아 입고 외할머니 댁에 갈 때면..
언덕위에 앉아서 따서 따서 들던꽃..
언니는 언제나 도라지꽃 나는 언제나 나리꽃..


이 노래의 제목을 모른다.
국민학교 6학년 음악책에 실려 있어 배운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직 노래를 차지 못하였다.
찾다 못해 내가 불러볼까 하였으나 악보가 없어 코드를 잡을 수 없으니 기타반주하면서 노래 불러보기도 어렵다.


난 어려서 클 때 할아버지 할머니가 안 계셨다. 오직 한 분 외할머니, 난 할머니의 정情을 외할머니에게서 모두 받았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노랫말에 외할머니가 들어간 이 동요를 좋아하였고 도라지꽃과 나리꽃을 볼때면 외할머니를 생각하면서 이 노래를 부른다. 시간이 나면 동요전문 사이트 등에서 이 노래를 찾아 봐야 하겠다. 정 구할 수 없으면 악보를 구한다음 직접 코드를 붙여 기타로 연주하면서 내가 한 번 부르면서 녹음하여 봐야겠다는 생각이다.

 

 

사진은 곱게 찍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에 나가 꽃을 피사체로 찍어 보니 곱게 찍는 다는 것은 자연이 아닌 인공을 찍는 것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연에서 피어서 지다보면 시든 꽃이 있고 혹은 기형이거나 벌레 먹은 꽃도 있게 마련인데 곱게 찍자고 시든 꽃을 따내다 보면 사람의 손이 가게 마련이고 그렇게 찍은 사진은 보기엔 좋을지 모르지만 자연의 모습은 아닌 것이다.

 

  지금 위의 더덕과 함께 피어난 도라지꽃도 그렇다. 비까지 오는 날씨인데다 더덕 꽃도 함께 피어 있는데 그대로 찍었더니 내가 보기엔 그대로 품위가 있다.  산더덕이 아닌, 언제인지 모르게 먹고 남은 더덕을 흙에 묻어 두었더니 절로 나듯 자라 오른 마당 한편의 더덕이지만 도라지와 따로 심었는데 어떻게 섞였을까? 더덕이 자라는 곳에 옆의 도라지꽃의 씨가 바람에 떨어져 싹이 돋을 것일까?

 

 

 

 

< 울가의 나리꽃. 동영상은 내가 서투른 솜씨로 촬영하였음. 건너산의 산나리는 산길 오를 엄두가 나지 않아...>

 

 

그리고 또 도라지와 나리꽃이 들어간 노래가 두 곡 있다.


~~~~< 1. 첫 번째 노래. 여름 > ~~~~~~~~~~~~~~~~~~~~~~~~~~~~~~~~~


도라지 캐러간 바구니 속에   나리꽃 메꽃이 웬일인가요.
랄라랄 랄라랄 랄라랄 랄랄    랄라랄 그러게 여름이죠.


쿵더쿵 방아가 춤을 추는데   마실간 누나는 왜 안올까요.
랄라랄 랄라랄 랄라랄 랄랄    랄라랄 그러게 여름이죠.

 

김영수 작사  / 홍난파 작곡의 1930년대에 만들어진 여름 이라는 곡이라고 한다.
"- 김포지방 민요" 가운데 위 노래와 가사가 거의 비슷한 노래가 있어 김영수 작사 / 홍난파 작곡이라고 하지만 민요를 채록하였는지도 모르겠다.  김포지방 민요는 아래와 같다.


1  바구니 끼고서 도라지 캐러 간   누나는 웬일로 안 오실까요
   라라라 라라라 라라라 라라   바둑이 데리고 찾아갈까


2  은하수 별들이 물결을 치는데   마을 간 언니는 왜 안 올까요
   라라라 라라라 라라라 라라   큰언니 손 잡고 찾아갈까

 

 

~~~~< 2. 두 번째 노래. 도라지꽃 > ~~~~~~~~~~~~~~~~~~~~~~~~~~~~~~~~~


도라지꽃
                 박화목작사 윤용화작곡

 

도라지꽃 풀초롱꽃 홀로 피었네
솔바람이 잠자는곳 산골짜기
옛부터 졸졸 흘러온 흰물줄기
한밤중엔 초록불내며 몸씻는 소리

 

도라지꽃 악보와 노래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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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악보오른쪽의 전체보기를 클릭한 후  " ▶ "을 클릭하면 노래를 들을 수 있습니다

  흐르는 노래가 방해 되면 화면 아래로 내려가 유튜브 동영상을 중지시킨 후 들어 보기 바랍니다. >


그런데 난 위 노래 가사의 도라지꽃과 풀초롱꽃이 다른 꽃으로 알고 찾아 보느라 애썼는데 알고보니 도라지꽃이 초롱꽃과에 속하는 꽃이어서 작사자가 도라지꽃을 풀초롱꽃이라고 붙였을까? 초롱꽃, 금강초롱꽃, 섬초롱꽃 등 초롱꽃목 초롱꽃과의 여러 종류의 초롱꽃도 위 상사화와 같이 우리나라가 원산이라니 이렇게 정이 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음은 메꽃.

위 노래의 가사에 들어 있어 지난해에도 이 사진을 글에 올렸다. 올해도 집 앞에서 여러차례 메꽃을 보았고 사진을 찍을까 하다가 그냥 넘겼는데 이 사진을 지금 다시 사용한다. 집 앞의 메꽃은 두세 송이 보이던 것이 이젠 10여 송이가 피어고 있는데 한창 필 때 사진을 찍어 볼 생각이다.

 

                               < 메꽃 - 나팔꽃과 메꽃은 비슷하지만 확연하게 다르다. 메꽃은 분홍빛이다.  >

 

 

흐르는 노래는 유튜브에 올라 있는 동심초同心草이다.

왜정시대倭政時代 이 노래를 부른 소프라노 김천애는 봉선화鳳仙花와 아주 깊은 사연이 있는 분이다.

아래 한국일보 기사를 보면 봉선화를 부르다가 3개월 옥고를 치렀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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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라노 김천애씨

[한국일보] 1995-04-03 (사회) 사망 30면 판 274자 스크랩

 소프라노 김천애씨가 지난달 30일 새벽(현지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 자택서 급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6세.
 서울대 음대교수, 숙명여대 음대학장을 지낸 김씨는 일제말 「봉선화」를 불러 민족의식을 일깨웠으며 해방후 한국 최초 교향악단인 고려교향악단 창립등에 참여했다. 1941년 일본 무사시노(무장야)음대 졸업음악회에서 앙코르곡으로 「봉선화」를 부르다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김씨는 72년 미국으로 이민, 혼자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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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67년 쯤 한장의 우리가곡 음반을 구하였다.

거기엔 테너 가운데 으뜸인 이인범이 부른 희망의 나라로를 비롯하여 테너 안형일의 산들바람과 함께 소프라노 김천애가 부른 봉선화와 동심초 등이 실려 있었다.

 

테너 이인범은 우리나라 테너를 처음 개척한 분이지만 고음에 약간의 탁음이 있다는 것을 음악시간에 들었는데 그 음반에 실린 희망의 나라로 산들바람 등과 함께 소프라노 김천애의 봉선화鳳仙花와 동심초同心草 등이 당시 중학생이던 내 가슴에 와 닿았다.

 

이 음반은 지금 없다.

1970년대 화재로 음반 650여장이 소실 되었는데  옛 음반을 파는 도깨비 시장에서 간혹 내가 소장하던 음반을 발견하고 사들이기도 하였지만 위의 노래들이 실린 음반은 아직 발견하지 못해 안타깝다.

 

한가지 더, 봉선화를 작곡한 홍난파나 동심초를 작곡한 김성태 등이 친일파로 판명 되었다.

위 신문기사에서 보듯 1941년에 김천애가 봉선화를 불러 3개월 옥고를 치렀다는데 그 노래를 작곡한 홍난파가 친일활동을 하여 친일파로 낙인 찍힌 것은 정말 아이러니이다.

 

봉선화와 동심초를 감상하더라도 홍난파나 김성태의 친일에 대한 비판 정신은 없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나 간혹 듣는다. 친일파가 작곡하여 안타깝지만 심금을 울리는 음악을 아예 백안시 할 수 없어서이다.

 

 

 * 유튜브 동심초 <== 클릭   http://youtu.be/Tcc9lHOvRz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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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에 "옛이야기와 앞이야기와 새이야기와 올이야기...(2013.04.13 수)"란 글을 쓰면서 당나라 여류시인 설도의 시를 김억이 번안한 동심초를 올린 적이 있는데 오늘 이 글에 흐르는 노래로 유튜브의 동심초를 채택하였다. 옛 김천애의 음반을 구하지 못해 안타깝고 흐르는 노래를 누가 불렀는지 알 수 없는 것이 아쉽지만 지금 우리나라의 많은 성악가들이 국제사회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으니 김천애의 후배들 가운데 어느 훌륭한 소프라노일 것이니 여기서 들어서 유감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너무 장황하여 한 번 더 쓸까 하다가 이렇게 마감한다.
상사화. 도라지꽃. 나리꽃. 메꽃. 이 네가지 꽃과 이 꽃들에 얽힌 감회, 그리고 흐르는 노래 등과 관련된 사연들
을 모두 쓰려면 더 많이 써야할 것 같다. 각 꼭지 마다 한 편의 글로 쓴다해도 유감이 없을 것이다. 더우기 요사이 글쓸 시간이 부족하여 이 글만해도 지난 08.13 화요일에 작성한 것을 6일이나 지난 오늘(2013.08.19 월요일)에 겨우 올리는 형편이니 독자 제현의 양해를 바랄 뿐이다.


  세상에 완전한 것이 없다는 것이 서유기(손오공)의 마지막에 나온다.
불경을 가지고 돌아오던 삼장법사가  요괴가 나타나 불경을 물에 빠뜨려 말리려고 바위위에 널었는데  돌에 눌어 붙어 표지가 훼손 되자 관음보살(?)이 나타나 인간세상에 완전한 것을 남길 수 없기에 일부러 그렇게 하였다는 설명이 등장한다.
나의 이 글도 어찌 완전하길 바랄 것인가?
이 것으로 만족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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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1) 깨, 김장배추, 무, 알타리, 고구마,봉숭아..

(2) 외할머니, 상사화, 나리꽃, 도라지꽃, 메꽃...

 


* 여름(1) 외할머니. 깨, 김장배추, 무, 알타리, 고구마,봉숭아..


  외할머니.
노랫말에 '외할머니'가 들어간 노래가 있다. 난 할아버지 할머니는 안 계셨고 오직 한 분 외할머니가 날 퍽 예뻐하셨던 기억만 있는데 노랫말에 '할머니'가 들어간 노래도 거의 없지만 '외할머니'가 들어간 노래는 아예 없다고 생각 된다.
오늘(2013.08.12 월요일)이 말복이다. 중복지나고 말복도 지나고 전국이 폭염특보가 내려지고, 모든 것을 키우는 여름이 가고 있다. 여름에 참깨를 수확한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안다. 또 깨를 베어낸 자리에 김장배추며 무 알타리무 등을 심을 수 있다는 것도 이제야 안다. 곁들여 매년 보는 도라지꽃 나리꽃 달맞이꽃이 한 여름에 핀다는 것도 새삼 알게 되었다.
(이 글은 내용이 길어질 것 같아 나누어서 한 번 더 쓸 생각 입니다.)

 

지난 주말(2013.08.10 토요일) 참깨를 베었다.
종묘상에서 깨 500알이라던가? 깨 씨앗 한 통을 9천원에 사다가 4월말경에 참깨씨 두 개씩을 이랑 좌우에 두 줄로 심은 것이 농약도 비료도 하지 않은채 거의 손을 쓰지 못했는데 어느날 보니 꽃이 무성하였고, 두어 달 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깨를 벨 때가 된 것이다.

 

             < 내가 심어 농약과 시비를 한 번도 안하였는데 두어 달 사이에 어느덧 풍성한 깨를 수확하게 되었습니다. >


농군도 아니고 주말농군도 아니고 건달농군 주제에 이런 풍성함이 공짜인 것 같아 흡족하다.
깨를 수확하기 까지는 아직 손이 많이 가야 한다고 한다. 묶어 세워서, 마른 다음에 털어서, 다시 깨를 햇볕에 잘 말리기 까지 여러번 손이 가고. 이 깨를 요리할 때 넣어 먹기도 하고, 깨소금도 만들고, 방앗간에 가서 참기름을 짜기도 하는 것이다.


지난달(2013007)에 지난해 수확한 깨를 몇 됫박 가지고 참기름을 짜러 갔는데 어떤사람이 보더니 '보약 입니다. 보약..'한다. 유명 메이커에서 파는 참기름이 있지만 직접 깨를 재배하여 짜먹는 것과 비교할 수 없으니 보약이라고 하는 것일 것이다.


위 사진의 깨를 베는데 중간에 나팔꽃이 피어 있었다.
난 나팔꽃이 농작물에 해롭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나팔꽃 줄기가 깨를 감고 올라 깨의 생육을 방해하고 깨를 벨 때도 보니 방해가 된다. 역시 모든 것은 제 자리가 있는 것같다. 깨를 베어 장마가 끝났다는데도 비가 오락가락하니 처마 밑 비가 안 들치는 곳에 나란히 세워 말려 두었다.


깨를 좌우 두 줄로 심었는데 그 사이에 100여포기 한 판을 1만원에 사온 김장배추용 배춧모를 심는다. 다음엔 알타리 무와 김장무를 심는다.  김장철이 되어 막상 김장은 절임배추를 사다 담더라도 심어서 수확한 배추와 무는  묶어서 달아 매어 시래기로도 쓰고 염장배추나 우거지로 김장에 넣어도 되니까 버릴일을 없을 것이다. 한나절의 수고로 농약도 거름도 주지 않고 가을까지 잘 자랄 것이고, 수확하게 되면 김장김치가 되고, 시래기가 되고, 염장배추가 되고, 우거지가 되어 밥상을 풍성하게 할 것이다.

 

 

 

봉숭아가 눈에 띈다.
고구마를 몇 이랑 심었는데 그 고구마의 한 쪽 자락에 절로 자란 봉숭아이다. 봉숭아는 봉선화라고도 하는데 둘 다 표준어란다. 간혹 봉숭화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사투리란다. 내 생각에는 봉숭아 봉숭화 봉선화 다 맞는 말일 것 같은데, 굳이 표준어에 봉선화를 넣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 우리 텃밭의 봉숭아를 내가 동영상을 줌 기능을 활용하여 촬영하였습니다. 떨어진 꽃이 보입니다. >

< 봉선화, 텃밭 고구마 밭 가의 봉숭아 꽃이 낙화하였다. 난 가을이 지나야만 낙화하는 것으로 알고 지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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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언간에 여름가고 가을바람 솔솔불어
   평화로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모습이 처량하다."


* 봉선화鳳仙花. 소프라노 김천애 노래(1940년대 녹음) <== 클릭   http://youtu.be/d0ElJJ1xu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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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숭아 <== 클릭 "전체듣기"에서 봉숭아 노래 1~3절을 들을 수 있습니다.   http://me2.do/GzBGEm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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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 작사 홍난파가 작곡의 봉선화라는 노랫말 때문에 내가 혹하였나 보다. 대부분의 식물들은 잎도 꽃도 시시때때로 지고 또 피어나는 것을 굳이 낙화가 때 맞춰 한 번에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지난해(2012년) 가을에 캔 고구마는 올 5월까지 먹었다. 그리고 올해 새로 고구마를 새로 심었고 얼마전 고메김치(*)를 담아 먹기도 하였다. 고구마 골에 풀이 가득한데, 그리고 줄기를 거둬서 들춰줘야 밑이 제대로 든다는데 그럴 여가가 없어 그내로 두기로 했다. 욕심낼 것 없이 캔 만큼만 먹으면 될테니까..

 

               ( * 고메김치 : 고구마줄기김치. 거제도 남쪽 대마도 가까이 있는 욕지도에서는 고구마를 고메라고 한다.

                                   고구마 줄기 김치는 고메김치라고 하고..                                                                   )

 

 

 

나는 아무리 더워도 덥지 않게 여름을 잘 보내고 있다.
번화하고 시끄럽고 복잡하고 현란스러워도 나는 나대로 여름을 멋있게 보내고 있다.
상사화도 피었고 도라지꽃 나리꽃 더덕꽃도 피었다.
이 이야기는 너무 한 번에 마치기엔 너무 장황할 것 같아 이어서 다음에 한 번 더 이야기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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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과(赦小過) 작은 잘못은 용서하라. 논어 자로(子路)편..

 실수 없다면 도전하지 않았기 때문...

 

 

 

 

 “사소과(赦小過) 작은 잘못은 용서하라”
 “작은 잘못을 용서해 준다면 형벌이 남용되지 않고 구성원이 기뻐할 것이다(小者赦之 則刑不濫而 人心悅矣)”
 “작은 허물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아래로 온전한 사람이 없게 될 것이다(不赦小過 則下無全人矣)”

 

사서삼경四書三經
사서四書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삼경三經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

 

 

                      < 용서와 용납. 용서보다 용납이 수평관계에서 서로 배려하는 것으로 느껴 지는데.. >


배우는 것도 때가 있다. 배울 때 배우지 못하면 다시 배울 기회를 얻기 어렵다.
난 사서삼경을 배우지 못했다. 우선 한자를 많이 알지 못하며 한문은 더욱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논어나 중용 등 사서삼경에 실린말이 나오면 그 뜻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래서 이겠지만 난 이 글의 '사赦'를 꼭 용서라고 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보다 용납이 더 낫지 않을까?  물론 옥편의 색인은 '용서할 사赦'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용서란 말이 너무 군림하는 말로 느껴진다. 그보다 용납容納이 상하관계가 아닌 수평관계에서 서로를 배려하는 것이 아닐까?


각설하고.. 종교를 신을 믿는 행위로 생각하지 말고 풍속이라고 생각하라는 말이 있다.
유교儒敎만 하더라도 그렇다. 유교는 종교나 사상이기 이전에 풍속이다. 동양사회가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더욱 그렇다.
  경전이라하면 유교의 사서삼경뿐 아니라 불경 성경 코란 등의 종교의 경전도 포함될 것이다. 때로 논어나 중용 등 유교의 경전에서 좋을 말을 발견하고 성경이나 불경에서도 좋은 말을 발견한다.    유교의 경전인 사서삼경은 우리의 풍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데 그 뿌리인 사서삼경을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것은 아쉬움을 떠나 살아가는데 불편을 초래한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배우고 때로 익히며 살아갈 수밖에...

 

 

난 얼마전 여기에 "채용(2013.02.01)"이라는 글을 통해 내가 사람을 쓰는 원칙을 이야기한 바 있다.

내용 가운데 "세상에 못쓸 사람은 없다"란 말과 함께 "똑똑한 직원은 유유상종하게 하라"라는 올렸다.

아래에 그 내용의 일부를 옮겨 본다.


똑똑한 직원은 유유상종하게 하라.
이 것도 내가 체득하여 실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령 A라는 사람이 유난히 능력이 뛰어나서 일을 잘하니 특별대우하여
승진 시켰다고 합시다. 그는 동료들과 인과관계가 좋지만 그래도 불화가 생기게 마련 입니다.  어느날 그 사람이 실수를 하게 되면 어~ 내가 믿었는데? 이상하다 싶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묻게 됩니다. 그러면 한결같은 반응은 사람을 잘못 보셨다. 그 사람이 일을 잘못했다는 답이 돌아 옵니다.  이는 그 사람의 친화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업무상의 불화 때문에 생기는 일인 것입니다. 그렇게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고는 믿었던 A를 내칩니다. 결과는 능력있는 사람이 도태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능력 있고 유능한 사람을 발견하면 스스로 차고 올라올 때까지 잘 키워낼 일입니다. 인위적으로 키우려해서는 그 사람을 단명하게 하는 지름길일 뿐입니다.  만약 정말 믿을 수 있다고 여겨지면 완전히 믿고 일을 맡긴다음 못 미더워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그의 능력평가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 이상. 2013.02.01 여기에 올린 글 "채용"에 쓰여 있는 글을 옮겼음 >

 

 

그런데 오늘(2013.08.09 금요일) 논어 자로(子路)편에 있는 "사소과(赦小過)"라는 말을 만났다.
작은 잘못은 용서하라? 이 말을 보면서 내가 쓴 "세상에 못쓸 사람은 없다"란 말과 함께 "똑똑한 직원은 유유상종하게 하라"라는 말을 떠올렸다.


사람을 쓸 때는 여러가지로 파악하여 신중히 써야하지만 쓰고 나서는 마음것 일하도록 맡겨야 한다. 관리감독은 해야 하겠지만 혹시 조그만 잘못이라도 있을까 못믿어 하면서 살펴서는 곤란하다. 만약 거의 감시하는 수준으로 살핀다면 혼자 해야 한다. 그런 자세로 다른 사람을 쓸 일이 아니다.


    “우리가 아무런 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위험에 충분히 도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글 창업주 레리 페이지-


마침  "사소과(赦小過)"와 함께 구글 창업주 '레리 페이지'의 좋은 말을 발견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소호 창업, 벤처 창업에 이어 지금은 스타트업이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창업을 돕는다고 한다. 그런데 가장 문제가 망하기 어렵다는 것이라고 한다. 망하기 어렵다? 쉽게 망할 수 있어야 과감하게 덤벼들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한 번 망하면 다시 일어설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워서 도전할 수 없는 것이다. 소호도 1인기업도 벤처도 스타트업도 다 마찬가지다. 망하기 쉬워야 한다는 말에 "사소과(赦小過)"나 "세상에 못쓸 사람은 없다"란 말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얼마전에 정계와 재계에서 패자부활법, 창업자가 실패해도 주저 앉지 않고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제도를 법제화하겠다고 하였는데 어떻게 되어 가는지 모르겠다.

 

 

"사소과(赦小過)" 작은 잘못은 용서하라
어찌 작은 잘 못 뿐이겠는가?  패자부활을 법제화 한다지 않는가? 망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아야 한다

면서, 위험에 충분히 도전하라면서 큰 잘못이라고 용서 못하랴.  일부러 저지른 것이 아니고 실수라면 크던 작던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난 잘못은 용서하지만 생각을 잘못하고 있는 것은 용서하지 않는다.
가령 제사에 안 갔는데 바빠서 혹은 깜박 잊고 못 갔다면 앞으로 그러지 말라고 타이르고 조용히 그칠 수 있다.
그러나 바쁘고 복잡한데 나 없어도 지낼 제사에 내가 굳이 갈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으로 안 갔다면 용서할 수 없다.  생각이 나쁜 사람은 앞으로 좋아질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떠한 잘못이라도 생각이 잘 못 되어 일부러 의도된 고의라면 몰라도 옳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실수한 것이라면 벌칙을 가볍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이 용납이다. 용서와 용납이 어떻게 다를까? 용서보다는 잘못을 용납한다는 말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작은 잘못은 용납하라."


한문 실력이 짧아 "사소과(赦小過)"의 사赦를 용납하라로 풀어서는 안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사소과(赦小過)"를 "작을 잘못은 용납하라" 라고 하는 것은 잘못일까?.
어쩐지 용서하는 말에서 거만함을 느낀다.

 

* 참고문헌
- 전자신문 [최경환의 젊은경제]연재 기사에서 "사소과(赦小過)" 일부 인용

 

 


"세상에 못 쓸 사람은 없다."
"똑똑한 사람은 유유상종하게 하라"
"작은 잘못은 용납하라."
“작은 잘못을 용납해 준다면 형벌이 남용되지 않고 구성원이 기뻐할 것이다”
“작은 허물을 용납하지 아니하면 아래로 온전한 사람이 없게 될 것이다”
“생각이 잘 못 되어 일부러 저지른 잘못은 용납할 수 없지만 옳바른 생각을 가졌는데 실수한 것이라면 벌칙을
가볍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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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맞이 꽃. 달맞이 꽃을 보면서 달린다..      요정(妖精 Nymph)과 함께 세월과 가을을 보면서...

 

 

 

  여름이 절정에 이르면 달맞이 꽃이 핀다.
애기똥풀이 피고 두 달은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달맞이 꽃이 피어나면 한 달 정도는 출근길에 달맞이 꽃을 벗하면 달릴 수 있다. 왜 출근길이냐고? 달맞이 꽃은 밤에만 핀다. 해가 뜨면 봉우리를 오무려 버린다. 그러니 아침 일찍 출근길이나 밤이 이윽하여 달맞이 꽃을 봐야 활짝 피어 있는 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철따라 여러가지 꽃이 핀다.
그런데 달맞이 꽃이 피면 유난히 여러 생각을 하면서 출근길을 달리게 된다. 이미 알고 있고 수없이 반복한 이야기와 노래를 되풀이 한다.


  달맞이 꽃 전설
이 전설을 중학교 때 1968년 쯤 영어책에서 알았다. 영어책에 달맞이 꽃 전설이 실려 있었고 영문으로 실린 전설을 선생님을 따라 읽으며 기억한 것이 지금에 이르기 까지 잊혀지지 않고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 길섶에 핀 달맞이 꽃. 07시가 지나면 꽃봉우리가 오무라지므로 햇살 없을 때 찍어서... >

                    = 화려하고 가득해야만 맛이 아니다. 수수한 달맞이 꽃이 그래서 좋다 =


또 한 가지 잊히지 않는 원인이 있다.
맹인가수 이용복이 1972년 부른 달맞이 꽃이란 노래이다.
난 기타를 들면 아르페지오 주법으로 이용복의 달맞이 꽃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하고 노래를 함께 부르기도 한다.  오늘은 오랜만에 기타를 치면서 이 노래를 한 번 불러 봐야 하겠다.

 


                                                         달맞이 꽃
                                                                                김정호/시   이용복/노래

 


               1.  얼마나 기다리다 꽃이 됐나                       2.  얼마나 그리우면 꽃이 됐나
                    달밝은 밤이 오면 홀로 피어                           한 새벽 올 때까지 홀로 피어
                    쓸쓸히 쓸쓸히 시들어 가는                            쓸쓸히 쓸쓸히 시들어 가는
                    그 이름 달맞이꽃                                         그 이름 달맞이 꽃
                    아~아~~  아~아~~                                     아~아~~   아~아~~

                    서산에 달님도 기울어                                   서산엔 달님도 기울어
                    새하얀 달빛아래 고개숙인                             새하얀
달빛아래 고개 숙인
                    네 모습 애처롭구나                                       네 모습 애처롭구나

 

 


< 유튜브 이용복의 달맞이 꽃>  <==클릭   http://youtu.be/XTZO3DMFpZ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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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에 요정(님프) 들이 햇님을 사랑했다고 합니다.


날마다 모여서 햇님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느라 시간 가느줄 몰랐지요.


그런데 한 요정은 달님을 사랑했습니다.


다른 요정들이 햇님만 사랑하는 것이 불만이었고 항시 달님을 기다렸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된 다른 요정들이 아폴로(태양신)에게 일러 바쳤습니다.


화가난 아폴로는 밤이면 구름으로 달을 가려 달을 사랑하는 요정이 달을 보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달을 사랑하는 요정은 달님을 기다리다 지쳐 그만 죽었고 그 자리에 예쁜 달맞이 꽃이 피어났습니다.

 

 


  달맞이 꽃은 밤에만 핀다.
달이 요요한 밤이면 더욱 아름답다.
위 이용복이 부른 노래 달맞이 꽃의 노랫말을 보라.
기다리다 지쳐 꽃이 되었고 달밝은 밤이면 피어나서 쓸쓸하게 시들어가는 달맞이 꽃의 애처로운 모습을 잘도 그렸다.


위 노래의 작사자도 작곡자도 달맞이 꽃 전설을 알았던 게다.
이용복은 맹인이니 달맞이 꽃과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이 노래를 더욱 절실히 불렀던 게다.

 

사실 달맞이 꽃은 귀하거나 멋있는 꽃이 아니다. 잡초 처럼 아무데나 흔하게 피어나서 밟히고 뽑히며 끈질기에 살아가는 모습이 애처롭지만 잡초로서의 강인함을 품고 있는 꽃이다.  얼마나 흔하였으면 연속극의 화면에 절로 잡혔을까?

 

                                                  < MBC 사극 '불의 여신 정이'에 등장한 달맞이 꽃 >


그런데 얼마전 이상한 꽃을 보았다.
이름하여 낮 달맞이 꽃이란다. ?? 그래서 살펴 보았는데 05월 말부터 피기 시작하는 낮 달맞이 꽃과 밤이면 피는 달맞이 꽃이 같은지 다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달맞이 꽃이 피었으니 궁금증을 풀어 본다.

 

                                   < 낮 달맞이 꽃. 꽃만 보고서는 달맞이 꽃과 잘 구별 되지 않는다. >


과연 현대의 육종술은 뛰어나다.

우장춘 박사의 후예들인가? 밤에만 피는 달맞이 꽃을 맘대로 볼 수 없으니 낮에 볼 수 있도록 품종개량을 한 것이겠지만 나는 다른 점과 같은 점을 굳이 찾았다.


낮 달맞이 꽃은 달맞이 꽃과 달리 달을 기다리지 않는다.
꽃송이는 거의 같다. 그러나 그 기다림까지 낮 달맞이 꽃에 옮겨오지 못했다.
달맞이 꽃은 키가 크고서야 꽃이 핀다. 그렇게 큰 키를 하고 핀 모습이 정녕 달을 기다리고 반기고 사랑하는 것으로 보인다.

비록 길섶에 이름없는 잡초처럼 피어 튼튼하고 실하게 피어나지 못했지만, 그래서 잘 자라지 못해 조그마하지만, 꽃가지 끝에 애처롭게 달린 모습은 퍽 달을 반기는 모습이다.

 

 

 

달맞이 꽃이 지면 가을이 오겠지..
가을이 오면 달맞이 꽃이 지겠지..
오늘도 달맞이 꽃을 차창 밖으로 보면서 달린다.
달빛아래 달맞이 꽃을 보면 그 애처로움에 가슴이 시리다.
새벽길 안개속에서 시드는 달맞이 꽃을 보면 세월과 가을이 보인다.
밤에 피어나 아침에 지는 달맞이 꽃에서 아름다운 기다림을 배우고 그 꽃에 나의 기다리는 마음을 싣는다.

 

 


 












.밝 누 리.

[밝은 우리의 온 삶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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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4대 해전. '한산도 해전'.. 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의 전력은 세계 최강이었다...

 

 

  나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그렇기에 더욱 알고 싶은 것이 많다. 전문가가 아니기에 모르는 것이 많고 그렇기에 더욱 알고 싶은 것이다.

임진왜란의 해전 가운데 가장 큰 해전이라는 한산도 해전이 세계 4대 해전 가운데 하나라는 책을 몇 년 전에 읽게 되었다. 사실 천만 뜻밖이었다. 인터넷이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그러나 인터넷에서 찾아본 한산도 해전은 세계 4대 해전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지 않았다.
한산도해전이 처음엔 뜻밖이었고 다음엔 실망하였고 또 그 다음엔 놀랐고 마지막엔 확고한 믿음이 생겼다.

 

 

                                      < 윤지강 지음  느낌이 있는 책 펴냄  세계계 4대 해전 >


 

먼저 세계 4대 해전을 살펴보자


1. 살라미스 해전( BC 480년)

   지중해의 도시국가 그리스와 동방의 대제국 페르시아 사이의 전쟁

2. 칼레 해전(1588년)

    영국과 스페인 사이의 종교전쟁.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격파되어 이후 영국이 해상권 장악


3. 한산도 해전(1592년)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왜倭 수군을 대파한 전쟁


4. 트라팔가르 해전(1805년)

   영국 넬슨 제독과 프랑스 나팔레옹 연합군 사이의 해전으로 나팔레옹 세계제패 좌절

 

위의 책에도 인터넷을 찾아봐도 세계 4대 해전을 대부분 위의 4개의 해전을 들고 있다.
난 처음에 한산도 해전이 세계 4대 해전가운데  하나라 것을 뜻밖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름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다.


이후 더 알고 싶어서 참고 서류를 보고 인터넷을 계속 찾다 보니 한산도 해전을 세계 4대 해전에 넣는 것은 극우분자들의 주장에 불과하고 각 나라마다 자기나라의 입장에 따라 정의할 뿐 아니라 전쟁이 너무 많아 한산도 해전을 넣는 것은 무리라는 주장을 발견하고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심을 가지고 지내다 보니 다시 놀랄 일이 생겼다. 알고보니 한산도 해전 당시 조선 수군은 세계 최강이었고 준비된 해군이 승리할 수 밖에 없었으며 더하여 이순신이라는 유비무환의 명장이 승리를 이끌게 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일부의 주장과 같이 한산도 해전을 세계 4대 해전의 하나로 넣는 것은 극우분자의 주장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은 잘 못 된 것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놀란 것이다.


마지막으로 확고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역사에도 해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세계 최초로 함포를 배에 싣고 전쟁을 치른 나라가 우리나라이고 왜倭  보다 확고히 우세한 병력수와 화력으로 승리한 한산도 해전을 세계 4대 해전에서 제외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한산도 해전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고 훌륭한 전쟁임을 알게 되었다.


위에 든 4개 해전 가운데 살라미스 해전(BC 480년)은 기원전의 너무 오래된 해전이어서 믿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올림픽의 꽃인 마라톤을 탄생시킨 전쟁이 살라미스 해전과 같은 나라 사이의 전쟁이었다. 지중해 그리스의 도시국가들과 페르시아와의 전쟁인데 BC 480년의 살라미스 해전보다 10년이 빠른  BC 490년에 승전보를 전하려고 마라톤에서 아테네 까지 40Km를 달린 달린 것이 마라톤의 효시 라는 것으로 보아 사실인 것 같다.
  공자(孔子 BC 551 ~ BC 479)와 같은 시대인데 그리스도시국가연합이 370척 페르시아가 800척의 전함을 동원하였다니 대단하다.  공자를 봐서도 살라미스 해전을 봐서도 BC 6세기(BC 500 ~ BC 401)에 세계는 이미 흥성하고 있었는데 우리나라는 역사시대에 접어들지 않았다는 일부 강단사학자들을 이상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우리나라 수군과 해전의 역사를 살펴보자
이미 말하였지만 난 역사학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 글을 학술적으로 분석하거나 사용하지 말기 바란다. 특히 학생들은 이 글의 내용을 공부의 재료로 삼아서는 안 될 것임을 밝혀 둔다. 한가지 더 이 글은 기억을 모아 쓰는 글이어서 여러 참고서적을 참고하였으나 한계가 있음도 아울러 밝혀 둔다.

 

1. 고구려 고건무 제독과 수나라 래호아의 해전(612년)

 

    "살수대첩"에서 고구려 고건무 제독과 수나라 래호아의 평양 해전.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수군은 살수대첩(612년)에서 고구려 고연무(후일 영류왕) 수군 제독이 수나라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수나라의 래호아가 끌고온 4만에 이르는 수군을 격파한 것이다. 고건무 제독이 래호아의 수군을 격파하지 못했다면 을지문덕 장군이 명장이라지만 살수대첩을 승리로 이끌지 못하였을 수 있다.


  그 이전에도 광개토대제(374 ~ 412) 가 백제를 치면서 수만의 수군을 동원하였고, 수차례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치면서 수군을 동원하자 고구려 역시 수군으로 대응하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소상하지 않아 고연무 제독을 제일 먼저 든다.


  고연무는 후일 영양왕에 이어 영류왕이 되어 당나라와 화친정책을 펼치다 전쟁불사파인 연개소문에 의해 시해된다. MBC에서 '칼과 꽃'이라는 사극을 보면 영류왕과 연개소문의 대결을 알 수 있다.

 

 

2. 백제부흥군과 나당연합군의 백강전투(663년)

 

   왜倭에서 온 부여풍이 병선 4백여척과 약 4만의 군대로 백제부흥군과 연합하여 나당연합군과 벌린 전투


660년 백제가 멸망한 후 백제 부흥군과 왜倭의 구원병이 합세하여 나당연합군과 벌였던 전투.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옹립하고 백강에서 싸웠으나 나당연합군은 왜선 4백여 척을 불태우는 등 크게 이겼다. 이는 백제부흥군의 입장에서는 패배이지만 신라 입장에서는 비록 당나라와 연합하였지만 400여척에 이르는 왜의 병선을 무찌를 쾌거가 되는 것이다.


지금부터 1400년쯤 전에 이미 우리나라는 왜와 해전을 치러 400여척의 왜의 병선을 무찌르고 승리한 것이다.

 

 

3. 해상왕 장보고의 동아지중해 해적 토벌과 해상권 장악(828~846)

 

   청해진대사 장보고(?~846)는 왜구 등의 해적을 소탕하고 해상왕이 되어 동아지중해(*)를 장악하였다.


고연무 제독이 해전을 치른 이후, 또 백강전투를 치른 이후 약 200년 내외가 지났을 즈음 신라 제42대 흥덕왕 3년(828) 4월에 청해진대사(淸海:莞島. 淸海鎭大使)가 된 장보고는 왜구를 철저히 토벌하였다. 

당나라와 명나라는 왜구의 침략을 많이 받은 나라들이다. 당나라와 같은 시기의 신라와 명나라와 같은 시기의 조선도 당연히 왜구의 침략을 많이 받았다.  신라의 청해진대사 장보고가 이 해적들을 소탕하여 동아지중해의 해상교역권을 장악하였다는 말은 해전을 치러 승리했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고려말과 조선시대에는 대마도 정벌과 화약을 발명한 후 개발한 화포와 함포로 왜구를 제압하였다.


장보고의 휘하에 있었던 것으로 예상되는 작제건의 아들이 왕륭(본명 용륭)이고 왕륭의 아들이 왕건이다.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에 웅거하여 왕건의 고려창업의 배후가 되는 해상세력을 기르고 보존한 것은 실로 우연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고려는 해상세력이 세운 나라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개경이 번영한 것은 해상교역의 중심지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해전사를 말하면서 장보고의 해적 토벌과 해상권 장악을 뺄 수는 없다.

( * 동아지중해 : 좁게는 발해와 황해를 넓게는 황해 남해 동해를 더 넓게는류큐열도 일대까지를 아우르는 바다를 유럽의 지중해와 같이 보는 동국대 교수 윤명철 교수를 중심으로 한 역사학계의 이론 )

 

 

4. 궁예와 견훤의 금성전투에서의 해전(903년)

 

    금성錦城(현재의 나주羅州)을 귀부歸附 시킨 태봉국 궁예의 장수 왕건과 후백제 왕 견훤의 해전


장보고 이후 불과 60년이 지났을 즈음 궁예의 태봉국은 903년 왕건을 사령관으로 금성錦城(현 나주羅州)을 공략하여 귀부 시켰다. 왕건은 수상세력 작제건의 손자로서 금성전투에 예성강지역을 배경으로 한 수상세력을 활용하여 수군을 동원하였다. 경기도 지역의 태봉국이 견훤이 지키는 충청도 지역을 지나서 육로로 나주를 공략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수상세력이었던 왕건이 바닷길로 나주를 친 것이고 당연히 해전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금성태수는 나총례였다.  우리 해전사에 나총례는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왜? 고려시대 여몽연합군의 고려군 사령관 가운데 하나였던 회원대장군 나유가 그의 후손이며 또한 임진왜란 때 조선수군의 신무기였던 거북선을 창제한 나대용이 그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몇해 전 왕건이라는 사극을 보면 해전이 그려지긴 하였으나 금성태수 나총례와 나주 장자 오다련은 육전만 치르고 궁예의 태봉국에 귀부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극작가의 역사인식 잘못이다. 당시 금성錦城은 바다에 접한 도시였다. 여황현(*) 까지 바닷물이 들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을 만큼 바다를 접한 금성전투를 육상전투라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금성태수 나총례와 나주장자 오다련이 수하에 수달水獺이라는 수군 장수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것을 봐도 그렇다.
< * 여황현艅艎縣: 현재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량동. 광역시로 합병되기 전 광산군 본량면. 조선시대에는 나주의 속현이었으며 옛 지명인 여艅와 황艎에 모두 배주(舟) 들어 있는 것을 보더라도 바닷가였다는 주장이 있음. 그러나 옛 지명은 여황余皇이었다가 나중에 舟가 더하였다는 주장도 있음 >


  해상세력인 왕건이 역시 해상세력인 금성태수 나총례와 손을 잡기 쉬웠을 것이고 그렇기에 왕건은 큰 전투를 치르지 않고 금성을 귀부 시켰지만 견훤과의 해전 그리고 금성을 지키는 수군과의 해전에 승리하였기에 고려 건국의 기반이 되는 금성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해전의 네 번째를 금성전투의 해전으로 든다.

 

 

5. 여몽 연합군의 왜倭 원정

 

   충렬왕 즉위년(1274년)과 충렬왕 7년(1281년) 2차례에 걸쳐 원과 고려의 연합군 일본 정벌


고려는 해상왕국이고 해양세력이 세운 국가이다. 고려가 몽골의 지배하에 든 충렬왕 원년부터 벌써 왜倭를 정벌하였다. 충렬왕 7년의 2차 원정에는 충렬왕이 직접 진두지휘를 하였을 만큼 적극적이었다.  원나라가 수전을 잘하지 못하는 것은 자명하다. 고려라는 해상왕국이 없었다면 몽골이라고 하여 쉽사리 바다건너 왜倭를 정벌하려고 할 수 있었겠는가?  비록 두 차례 모두 뜻아니하게 태풍(신풍)을 만나 실패하였지만 여몽연합군의 두 차례에 걸친 왜倭 원정은 해상왕국인 고려의 수군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할 것이다.


  가. 첫 번째 여몽연합군의 왜倭 정벌(1274년)
       원군 2만 명에 고려군 8천 명의 병력에다 전함 9백 척 규모로 1274년 10월 6일 합포를 떠나 대마도(對馬島)를 공략하고 북구주(北九州 기타큐슈)에 이르렀으나 왜군 倭軍의 저항이 심하고 폭풍우로 전함이 좌초되고 많은 병사가 익사하자 귀환하였다.


  나. 두 번째 여몽연합군의 왜倭 정벌(1281년)
       원군 3만 명과 고려군 1만 명에 전함 9백 척의 규모로 합포에서 출정, 2차 원정 역시 작전의 실패와 또 다시 왜인倭人들이 가미카제(kamikaze 신풍神風)라 부르는 태풍을 만나 10만의 병력 손실과 함께 실패하였다.


그런에 이 두 차례 여몽연합군의 왜倭 원정에는 우리가 알아야할 우리나라 해전의 역사가 숨어있다.

하나는 전함이다. 몽골의 요구로 300여척의 전함을 고려가 건조하였는데 세계에서 최고最高이고 최고最古인 전함이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200년 이상 뒤의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할 때 사용한 선박과 비교해도 크게 안전하고 승선인원과 적재량이 당시 세계 최고여서 많은 병력과 무기적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배를 건조한 책임자가 나주출신 회원 대장군 나유이다. 나유는 왕건과 교전한 금성태수 나총례의 10세인데 선박건조 담당 부부사(部夫使)가 되어 나주와 전라도 등에서 공장(工匠)과 인부 3,500여 명을 모아 짧은 기간에 300여 척의 전함을 건조한 것도 당시로선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이렇게 건조한 전함이 태풍(카미가제 신풍神風)을 이기고 거의 대부분 생환한 것이다. 당시 몽골의 전함은 태반이 수몰하여 돌아오지 못하였다. 세계 최고最高 선박의 진가가 잘 나타난 것을 알 수 있다. 이 내용은 이종호 지음 "한국의 7대 불가사의"란 책에 실려 있고 내가 쓴 몇몇 글에도 그 내용이 있다.

 

 

6. 고려 우왕의 "진포 해전"(1380년)

 

    고려말 우왕(재위 1374~1388과 창왕(재위 1388~1389)의 왜구토벌 해전인 "진포 해전"이다.


   여몽연합군의 두 차례에 걸친 왜倭 원정으로 부터 100여년이 지났을 무렵 고려 해군은 또 다를 발전을 하고 있었다. 최무선이 화약을 발명하여 화포를 제작하여 함선에 함포를 장착하게 된 것이다. 최무선 장군이 화약과 화포를 만들려고 노력한 이유는 왜구를 물리쳐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고려말 40년 동안 약 500여회에 이르는 왜구의 침략이 있었다. 우왕 6년(1380) 8월 나세 · 심덕분 · 최무선 등의 고려 해군은 전선 100여척을 이끌고 왜구의 선박 500여척을 화포를 이용하여 불태운다. 이 "진포 해전"은 세계 해전사상 화약무기를 사용한 최초의 해전이다.  3년후 우왕 9년(1383) 정지 장군이 왜120여척을 남해의 관음포에서 화약무기를 활용하여 격퇴한다.


  1380년에 이미 세계 최초로 선박에 함포를 싣고 사격을 하였으니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처럼 세계 해전사에서 최초로 함포를 전함에 싣고 해전에서 함포사격을 한 최초의 전투가 고려의 "진포 해전"으로 고쳐져야 한다. 일부 외국의 역사학자들은 1410년 영국해군이 함포를 배에 실었다고 하는데 이는 잘 못인 것이다.

 

 

7. 여말선초의 세 번에 걸친 대마도 정벌(1389년 ~ 1419년)

 

   고려 창왕 1년(1389년), 조선 태조 5년(1396년), 세종 1년(1419년) 등 세 차례의 대마도 정벌


  가. 첫 번째 대마도 정벌
       고려 창왕 1년(1389년) 박위 장군은 병선 100여 척, 병력 1만여명 내외로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고질적인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이미 여말에 고려 수군이 대마도를 정벌한 것이다.


  나. 두 번째 대마도 정벌
       조선 태조 5년(1396년) 김사형(金士衡)이 오도 병마처치사(五道兵馬處置使)가 되어 2개월여에  걸쳐 대마도 섬을 정벌하였다.


  다. 세 번째 대마도 정벌
      세종 1년(1419년) 함선 227척, 병력 1만 7,258명, 식량 65일분을 준비하여 이종무(李從茂) 유정현(柳廷顯) 최윤덕(崔閏德) 등이 이끈 정벌이다.


세 차례의 대마도 정벌은 고려와 조선의 수군이 100여척 부터 227척의 선박을 동원하였고, 함포를 사용하여 수군의 전투력을 기르게 되어 조선 수군의 정예화의 게기가 되었다. 대마도 정벌은 강력한 수군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8. 삼포왜란과 연이은 왜변을 제압한 조선의 수군(1510~1555년)

 

   중중 5년(1510년)의 삼포왜란, 중종 39년(1544년) 사량진 왜변, 명종 10년(1,555년) 을묘왜변


   조선은 대형 화약무기의 개발을 계속하였고 삼포왜란에 이은 두 차례의 왜변은 해전에서 함포를 이용한 실전 노하우를 축적하게 하여 조선 수군이 정예화 되는 데 기여 하였다. 각 종 총통과 대장군전大將軍箭이 보편화 된 것이다. 조선 수군은 이런 대형 화포를 주조하기 위한 동철銅鐵이 모조라 절의 종을 거두어 총통을 제작하는 일까지 있었다.


조선 초기부터 임진왜란 사이의 조선 수군의 전력을 살펴보자.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군선은 829척이고 병력은 5만 402명이다. <<경국대전>에는 군선 739척과 병력 4만 8,800명으로 기록 되어 있다. 조선초기의 수군은 병력 5만명에 병선 700척 내지 800척을 보유하였으니 인구 5천만의 대한민국 수군 병력 못지 않은 전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 "세계 4대 해전"에서 거론한 임진왜란과 비슷한 시기의 칼레해전(1588)에 동원된 군사력을 보자. 칼레해전에 동원된 영국 함선은 197척이고 병력은 1만 5,000명이었으며 스페인 무적함대는 함선 130척에 병사 3만명이었다. 조선과 영국이나 스페인의 군사력을 수평비교 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조선의 수군의 막강함이 돋보인다.

 

 

9. 임진왜란과 한산도 해전(1592년)

 

   이순신 제독의 막강한 조선 수군은 임진왜란(1592~1598) 내내 왜倭와의 해전에서 승리하였다.


왜일까? 준비된 승리였던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 육군은 연전연패하였다. 왜倭의 조총앞에 무너진 것이다. 그러나 수군은 달랐다. 함포로 무장한 강력한 수군은 왜의 수군을 철저히 격파하였다.

조선 수군은 함포 사격술에 관한한 세계의 지존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준비된 조선 수군은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고의 전투력과 함께 이순신이라는 걸출한 장군이 있었으니 세계인들이 한산도 해전을 "세계 4대 해전"의 하나로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행주대첩 진주대첩 한산대첩
임진왜란의 3대첩을 보면 모두 유비무환의 승리였다. 조총의 위력은 근접전에서나 발휘할 수 있다. 천자 ·지자 ·현자 ·황자총통 등 화포로 무장한 조선군은 멀리서 접근하는 적을 화포 공격으로 무력화 시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상 우리나라 해전의 역사를 살펴 보았다.
우리나라 역사하면 바다는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더우기 해전에 대하여서는 거의 생각할 것이 없다.

기껏 임진왜란에서 왜군倭軍을 무찌른 노량 해전이나 한산도 해전이 떠오르긴 하지만 그 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세계 최초로 함포를 배에 싣고 해전을 한 나라이다.
  우리나라에 해전이 없었던 것도 아니요 해군력이 약한 것도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가장 막강한 전함과 함포를 가지고 있는 나라였던 것이다. 이런 우리나라의 해전사를 바로 알고 긍지를 가져야 하겠다.

 

내가 여기에 쓴 "과학의 날(04.21)과 물방개의 노래와 거북선... (2013.04.25 목요일)" 이란 글에

"우리나라의 선박건조술은 세계에서 최고最古이고 최고最高"라는 글을 올린 바 있다. 이 글에는 세계에서 제일 크고 강하고 병력을 많이 실을 수 있는 병선을 건조한 고려에 대하여 그리고 그런 배의 건조 책임자였던 회원대장군 나유羅裕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금성전투의 한 축인 금성태수 나총례의 10세가 여몽연합군의 고려 사령관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회원대장군 나유이다. 그리고 나유의 11세가 임진왜란시 이순신 장군의 막하에서 조선장造船將으로 실제 거북선을 창제한 나대용 장군이다. 그리고 나대용의 종제인 나치용은 돌격장(거북선 함장으로 추정)으로 이순신 장군과 함께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다.  우리나라 해전의 역사에 나총례와 나유에 이어 나대용으로 이어진 DNA는 우리가 잘 모르고 있어서 그렇지 큰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세계역사상 가장 뛰어난 해전 "한산도 해전"
우리역사에도 많은 해전이 있었고 뛰어난 지휘관과 무기와 전함이 있었음을 살펴 보았다.  세계역사에 등장하는 모든  해전 가운데 "한산도 해전"은 가장 뛰어난 해전이다.  어느 해전도 한산도 해전능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유비무환, 철저히 준비하여 이기는 전쟁이 빛나는 전쟁인 것이고 임진왜의 조선수군은 그런 전쟁을 치른 것이다.


우리의 것을 바로 알고 지켜야 한다.
"한산도 해전"도 그렇다. 왜 극우의 지나친 주장이라고 하는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이 유비무환으로 준비하고 있다고 통렬하가 적을 무찌른 전투, 이런 전투를 그렇게 평가해서 되겠는가? "한산도 해전"은 세계 4대 해전임은 물론이고 하나만 꼽는다면 세계 제일의 해전인 것이다.

 

                        < 2012년 과학의날(04.21) 국비로 소충사에 건립된 거북선을 창제한 나대용 장군 동상 >


= 참고 문헌 =
* 이종호 지음 "한국의 7대 불가사의" 역사의 아침 펴냄
* 윤지강 지음 "세계 4대 해전" 느낌이 있는 책 펴냄
* 임원빈 순천향대 이순신 연구소장. 전 해군사관학교 교수부장 "다시보는 리더십 이순신" 포스토 신문 연재기사

   - 조선 수군이 세계최강이었다는 부분과 관련된 자료는 임원빈 소장님의 글에서 발췌.
그 외 필자의 평소 지식과 인터넷 검색을 통하여 참고 자료를 수습하였음.

 

 

 

 

한산도 해전은 세계 제일의 해전임이 분명하다.
만약 세계 해전 가운데 하나만 꼽으라면 당연히 한산도 해전을 꼽아야 할 것이다. 전쟁은 유비무환이다. 약한
병력으로 큰 병력을 이겨낸 것이 자랑이긴 하지만 제대로 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임진왜란 당시 행주대첩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분명 약한 군사력으로 강한 적을 이겨 내었다. 그러나 이는 잘한 일일 수는 없다. 군비를 갖추어 적의 군사력을 압도하여 이기는 전쟁이어야 제대로 된 일이라 할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다가 쳐들어 오는 적을 우세한 군사력으로 무력화 시킨 한산도 해전은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해전이고 그렇기에 세계 앞에 자랑할 수 있고 자타가 그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혹자들이 세계에는 많고 많은 해전이 있는데 한산도 해전을 "세계 4대 해전"에 넣을 수 없다고 하는데 난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길 수 있는 전쟁을 하는 것이 제일이고 준비된 전쟁을 하여 이기는 것이 제일이라면 한산도 해전은 당연히 제일 뛰어난 전쟁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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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회, 경포대와 제주와 포항과 울릉도에서 물회를 즐겼지만 집에서도 즐기고 싶다.

 

 

  바닷가에 가면 생선회를 먹기 마련이다.
그런데 물회라는 생각지 못한 음식이 있다. 이제는 물회도 여기저기 많이 먹는 음식이 되었는 것 같다.
난 1980년 강릉에서 처음 오징어물회라는 색다른 음식을 맛 보았다. 그러고선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1980년대
말쯤 제주도의 어느 시골 골목안의 조그만 대포집 할머니가 요리한 자리돔물회를 맛보았다. 다음은 포항에서 맛본 물회이다.

  보통 회는 마른 천으로 꾹 짜서 물기를 없애고 먹는다. 그래야 포뜬 살이 물러지지 않고 쫄깃쫄깃하고 맛이 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선을 잘게 썰어 물에 말아 먹는다는 것이 처음엔 이상했다. 하지만 물회는 생선회와 른 맛을 선사한다. 물회는 따로 철이 먹는 철이 없지만 여름에 더울 때 얼음을 띄워 시원하게 먹는 것이 제 일 것이다.

 

                                          < 물회. 오이냉국을 즐긴다면 얼큰한 물회를 맛 볼 일이다. >


  1981년이나 1982년 경에 난 강릉 출장을 가게 되었다.
지방의 금융기관에 근무하는데 멀리 강릉까지 출장명령을 받아 출발한 것이다. 당시 나는 20대 후반이었는데 그 전에도 강릉을 두어 차례 가 봤지만 이렇게 혼자 가는 것은 처음이어서 설레이는 마음으로 출발하였다. 1980년대 초에도 영동고속도로는 뚫려 있었다. 지방에서 기차로 올라 왔던듯, 어떻게 고속버스를 타지 않고 기차를 탈 생각을 하였는지 청량리 역에서 22시반 쯤에 출발하는 열차를 타려고 했는데 만석이 되어 표를 구하지 못해 낭패를 보게 되었다.


이를 어쩌나.. 망연하여 어디서 저녁을 지낼까 거리를 지나는데 누군가가 호객을 한다. 베스타를 타면 1만 원에 강릉까지 데려다 준다는 것이다. 지금 아직 자리가 있으니 타라고 한다. 난 망서리지 않고 차에 올랐다. 거의 한 시간을 기다려 차가 만석이 되어 자정이 다 된 시간에 출발하였다.


대관령을 불법영업행위를 하는 베스타를 타고 넘는다. 위험한 일이다. 지금도 그런 교통편이 있을까? 산을 넘고 들을 건너 구불구불 대관령을 넘는다. 우와~ 새벽 02시가 지난 시간이었을 것이다. 대관령 꼭대기에 안개가 자욱하여 거짓말 않고 5m 앞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마침 앞 자리에 앉았기에 확실히 볼 수 있었다. 헤드라이트를 켰지만 안개만 비칠뿐 앞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차의 운전기사는 늘 겪는 일인듯 중앙선의 노란 라인만을 따라서 잘도 달린다. 당시는 고속도로지만 중앙선이 노랗게 칠해져 있는 왕복 2차선 도로였던 것 같다. 이렇게 중앙선의 노란 라인을 따라 대관령을 넘었다.


그렇게 강릉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하여 차를 내린 시간이 03시 30분 쯤이었다.
시간이 어중간하여 참 마땅치 않았다. 아직 대중교통이 움직이지 않고 그렇다고 잠시후면 날이 샐텐데 숙소에 들기도 그렇고 막연하여 가방을 들고 거리를 배회하였다.
  그런데 방범초소인지? 순경이 그런 나를 수상하게 보았는지 부르더니 신분증을 내 놓으라고 한다.

때도 컴퓨터가 있었을까? 1980년대 초였으니 아직 없을 때였을 것이다. 경찰서면 몰라도 그렇게 순경들이 야간에 근무하는 방범초소에 컴퓨터가 있을리 없다. 그러나 전화가 있다. 그 순경이 전화로 조회하고, 기다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 번 고소 당하여 무혐의가 된 것만 나타나지 아무 이상 없다고 가라고 한다. 헛~ 이 무혐의 처분은 그야말로 억울하게 돈을 물어준 사건이었는데 여기서는 넘어가고 후일 글로 쓸 것을 기약한다.


이렇게 05시가 좀 넘었던가.. 순경한테 물어 봐서였는지? 택시를 탓던가? 어떻게 경포대 해수욕장에서 아침을 맞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평생을 기억하는 이상한 일을 당하게 되었다. 엊그제 신문에 올해(2013년) 경포대에 48만 명이 넘는 피서객이 몰려 음주금지가 풀린 해변에서 즐겼다는 기사를 보았다.

하지만 1980년대 초 경포대 해변은 여느 시골 바닷가 처럼 한적하였다.


난 해수욕장의 해변에 폐선인지 거꾸로 놓인 배에 기대 앉아 아침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때였다. 어떤 낯모를 아가씨가 오더니 이상하게 나의 옆에 바짝 붙어 앉는다? 나도 20대 후반이었으니 그렇게 예쁜 아가씨가 싫을리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 곳이 생면부지의 타향이라는 점이다. 혹시 말로 듣던 꽃뱀이 아닐까? 내가 뭐라고 말을 걸었다고 낭패 당하는 것 아닐까?


난 말 한 마디 걸지 않고 그 자리를 피해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다른 곳에 가서 앉았다. 하지만 잠시 후, 이 아가씨가 다시 내 옆으로 오더니 주저하지 않고 바짝 붙어 앉는다. 이 쯤 되었으면 못 이기는 척 말을 걸고 수작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겉 보기에 수수하고 끼는 전혀 없어 보이는데? 그러나 또 그 자리를 털고 일어나 되돌아 멀리 보이는 해변의 가게로 향하였다.


가게에 드니 나 말고도 다른 손님 하나가 앉아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나도 술이라면 두주불사는 아니지만 남 못지 않게 마시는 처지여서 비록 이른 아침이지만 자리를 잡고 앉아 소주를 시켰다. 그러고는 안주를 뭘 시킬까? 아침 요기를 겸하여 밥안주(*)를 시켜야 겠구나 하고 있는데.. 어~ 이런..언제 나갔는지 소주를 마시고 있던 손님이 밖에서 들어오는데 아까 내 옆을 맴돌던 아가씨와 함께였다? ( * 밥안주: 따로 안주없이 밥반찬을 안주로하는 것)


언제 벌써 그 아가씨가 저 남자를 꾀었나?
그러거나 말거나 난 가게 주인을 불러 밥안주로 먹을만한 아침거리를 물었다. 그런데.. 그 아가씨와 함께 들어온 그 남자가 술과 안주를 들고 내 자리로 옮겨온다. 그러더니 자기가 술과 아침밥을 사겠다고 한다. 무슨 이유로??


알고보니 사연이 있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연인 사이인 남녀가 강릉 경포대에서 싸웠고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그 아가씨가 내 옆에 붙어 수작을 하여 다정한 것 처럼 보이게하여 자기 애인을 화나게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 아가씨는 애인이 미워서 만약 내가 말을 걸거나 수작을 하면 무조건 따라 나설려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내가 말 한 마디 건넨지 않고 자리를 피하자 그 두 사람은 다시 화해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두 사람이었지만 그 사람은 내게 물회, 오징어 물회를 먹자고 한다. 난 그 때까지 아나고(붕장어)회 정도를 생선회라고 맛 본 처지여서 물회라니 전혀 생소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 남자가 적극 권유하기에 난생 처음 물회라는 음식을 맛보게 되었다.

 

 

이렇게 처음 맛 본 바다생선물회가 이후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되었다.
이후 제주도의 큰 식당이 아닌 시골 바닷가의 허름한 대포집에서 제주도의 명물이라면서 자리돔물회라는 음식을 맛 보았고, 포항 고속버스터미널 뒷골목의 허름한, 아들이 미국 있다는 일흔이 넘은 할머니가 경영하는 대포집에서 물회를 맛 보았고, 또 울릉도의 선창가에서도 물회를 맛 보았고, 다 윗 글 만큼이나 사연이 있지만 기회가 있다면 후일 거론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전문가는 다르다.
한양대 경영학부교수이며 음식문화평론가인 예종석 교수가 물회에 대하여 쓴 글을 발췌하여 옮겨 본다.

 

 * 잘개 썬 회를 양념장에 비벼서 물에 말아 냉국처럼 먹는 별난요리이다.
 * 개운한 것이 해장음식으로도 손색이 없어서 지역에 따라서는 '생선냉국' 또는 '술국'
이라고도 불릴 정도이다.
 * 포항에는 실제로 100군데가 넘는 물회 식당이 있고, 최근에는 '포항물회연합회'라는 조직이 결성될 정도로
 물회를 사랑하는 고장이다.
 * 물회는 다양하다. 옛날에는 가자미류, 광어, 도미 등 흰살생선을 주로 사용했지만 요즘은 우럭, 쥐치, 학꽁치, 전어,
 강리는 물론 소라, 성게알, 개불, 멍게, 해삼, 전복 등 갖가지 해산물이 재료로 쓰인다.
 * 지역에 따라 강원도는 오징어와 한치, 제주도는 자리돔, 부산 눈볼대(빨간고기), 울릉도는 꽁치, 거제도는 멸치 물회
가 유명하다.
 * 물회의 맛은 재료의 신선도와 양념장이 좌우한다. 재료로는 생선회나 해산물 외에도 채 친 오이와 배 ·상추 ·당근 ·양파
 ·쪽파 ·쑥·갓 ·고추 같은 채소와 고추장이나 된장에 식초, 다진 마늘, 깨, 참기름 등을 버무려 만든 양념장이 들어간다.
 * 갖은 재료를 양념장으로 비빈 다음 생수를 좀 붓고 얼음을 몇 개 띄워 먹는다.
 * 먹는 순서도 중요하다. 먼저 회를 건져 먹은 다음 국수나 밥을 말아 먹으면 좋다.

   육수를 생수 대신 과일즙이나 매실농축액을 썪은 새콤달콤한 육수가 젊은 층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 이상. 한양대 경영학부교수이며 음식문화평론가인 예종석 교수가 물회에 대하여 쓴 글을 발췌 >

 


나는 물회가 있는 곳에 가면 될 수 있으면 물회를 주문한다.
죽변, 거진, 대진(구룡포 남쪽), 마량, 무안, 현경, 목포 등 어디를 가나 물회를 만나면 우선 주문하는 버릇이 몸에 베었다. 그 만큼 부담 없고 먹을만한데다 값도 비싸지 않아서이다. 하지만 지금은 물회값이 난데없이 춤을 추는 경향이 있다니 앞으로는 그렇게 만만하게 물회를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도미로 하는 돔물회,  어랭이물회. 대합물회. 전복물회. 오징어물회. 한치물회. 물회의 종류를 다 말할 것은 없겠다.  포항의 구룡포 남쪽 양포와 사이의 이름모름 마을에서 할머니 해녀가 갖 물질하여 잡아올린 생선을 잘게 썰어 즉석에서 요리한 물회는 그 생선이름 마저 경상도 지방의 말이어서 모르지만 언제고 가면 다시 먹고 싶다.


집에서 물회를 요리하려면 오이냉국을 생각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생선살이나 해산물을 잘게 칼질하여 오이냉국처럼 요리한 물회, 내가 음식요리를 몰라 하는 말인지 모르지만 위에 예시한 양념을 모두 갖추어야할까? 집에서 물회를 마련하면서 굳이 양념을 모두 마련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준비할 수 있는 양념으로 요리하다 보면 입맛에 맞는 요리법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양념을 제대로 갖추어야 제 맛이 나겠지만 꿩대신 닭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 물회에 해삼을 좀 넣었다고 값이 곱베기가 되다니.. 맛은 더 있겠지만.. >

 

 

 


  어디나 장사꾼의 상술이 문제이다.
물회는 그렇게 비싼 음식이 아니다. 그런데 해삼, 전복, 성게알과 같이 전에는 잘 쓰지 않던 해산물을 넣어 턱
없이 비싼 값을 부르는 회집들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 어떻게 할까? 여름이면 오이냉국을 시원하게 즐기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수산시장에 나가 신선한 회감이나 해산물을 사가지고 들어 식구들이 함께 즐기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나도 일찍 부터 물회를 맛 봤지만 다양한 물회 맛을 보지는 못하였다. 해장국 처럼 물회를 즐기려면 역시 집에서 요리하여 먹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어쩔거나...

 


 

 










.밝 누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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