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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9.17 수 십년 전의 연애추억. 뇌세포가 늘어나도록..

수 십년 전의 연애추억. 뇌세포가 늘어나도록..

 


  수십년이 흘렀지만 잊지 않고 있는 기억이 있다.
누구나 그렇겠고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가물가물 잊혀졌던 기억을 불현듯 되살리는 일이 있다. 어제(2013.09.16 화) 라디오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


 "뇌가 나이들면서 퇴화하는 게 아니다. 어떤 특정분야를 하려고 하면 그 부분의 뇌세포가 새롭게 생성된다. 머리를 써야 뇌세포가 새롭게 형성 된다."


KBS1 Radio에서 오전에 방송하였는데 번쩍 정신이 들게 만드는 말이었다. 몸도 뇌도 사용해야 건강을 유지하고 더 새로워 지고 더 건강해 진다는 것을 이제야 알다니.. 난 뇌는 타고 나는 것이지 사용함에 따라 새로운 뇌세포가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고, 더우기 나이 들어도 뇌의 이런 활동이 그치지 않는 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 경북 구미 금오산의 큰바위얼굴 >


  기억의 울타리를 넘는다.
우리나라에는 평해平海라는 지명과 해평海平이라는 지명이 있다. 평해는 경북 선산군에 있는 해평면이다. 그리고 평해읍은 경북 울진군에 있다. 이 두 곳이 내가 수십년 전에 인연이 있었다. 그리고 글자를 앞뒤로 바꾸면 되는 평해平海와 해평海平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

 


먼저 평해平海.
경북 선산군 해평면 문량동 000번지. 이OO. 수십년이 지나고도 이 주소 이 이름을 잊지 않고 있다. 1970년대 초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여기서 이OO을 만났고 사진을 찍었고, 껌을 주었고, 펜팔을 하였고, 수십장에 이르는 장문의 편지를 주고 받았고, 하루종일 먼지나는 비포장도로를 달려 대구에 가서 또 대구에서 버스를 타고 선산군에 있는 금오산에 가서 그녀를 만났고, 이후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헤어질 때 까지 청춘의 속삭임은 계속 되었다.


1970년대 초의 수학여행은 국내여행이었다. 아마 1980년대도 그러했을 것이다. 난 사진기를 디피사(*)에서 빌려 갔다. 그리고 껌을 여러통 준비하여 안의 금딱지 종이틈에 내 주소를 쓴 쪽지를 끼어 넣었다.

당시는 가정에 전화 있는 집이 드물었고, 펜팔이라하여 얼굴도 모르는 남녀가 편지를 주고 받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주소를 보고 편지가 오면 펜팔을 하려고 주소를 적은 종이쪽지를 넣어 둔 것이다. 요즘처럼 휴대폰이나 전화, 메일이나 메신저 등 마음대로 소식을 주고 받지 못하는 시대에는 펜팔이 남녀교제의 방편이었던 것이다.
( * 디피사. 카메라 사진을 흑백으로 빼어주는 점포를 디피사라 하였는데 사진관 보다는 작은 규모였다.)


  사진기를 들고 설악산 어느 계곡이었을까?
어떤 여학생들이 사진을 찍어 달라지 않는가? 아니 어쩌면 내 고교동창생 가운데 누군가가 그 여학생들에게 함께 사진 찍기를 청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사진기를 가지고 간 나는 수학여행 기간 내내 사진을 찍느라 바빴으니까...
  그 여학생 가운데 한 여학생에게 내 주소가 쓰인 쪽지가 든 껌을 주었다. 여러 친구 사이에 싸여 있던 그녀가 그 쪽지를 펼쳐 보더니 얼른 감추는 것을 보고서 어쩌면 편지가 올지도 모르겠구나 생각하였다.


  과연 편지가 왔고 펜팔이 시작 되었다.
압화壓花. 난 에델바이스 꽃을 붙인 압화편지를 받았었다. 그 후로 오래도록 편지를 주고 받는 펜팔이 지속 되었다. 결국 만나자고 하고 당시로선 머나먼 대구까지 가서 그녀를 만나 영화 '러브스토리'를 보았고, 다시 버스를 타고 금오산에 가서 폭포를 바라보며 거닐고, 큰바위얼굴을 보며 행복해 했다.


그런 아름다운 시절을 지냈으나 몇년 후 내가 변심하고 말았다.
내 느낌으로 그녀의 높은 꿈과 이상을 내가 채워 줄 수 없겠다는 생각으로 헤어질 것을 결심하였다. 어느해 함께 해운대 해수욕장을 거닐면서 조개껍질을 주었다. 그녀는 줍고 난 두 손을 바가지 모양으로 하여 받고.. 그렇게 거닐다가 내가 손에 있는 조개를 바다에 내던지며 외쳤다.


"우리의 꿈도 저 조개껍질과 함께 영원히 파도속에 묻혀라!"


그녀는 깜짝 놀랐으나 어떤 내색도 하지 않고 다정하게 평소처럼 돌아 왔으나 이후 어떤 연락도 마다 하였다. 퍽 마음이 아팠다. 영영 잊힐 때까지 아주 많이 애달파 했던 그녀도 지금은 어느하늘아래서 단란하고 아름답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다음은 평해平海
울진군도 생소한데 평해야 말 할 것도 없다.  1970년대 후반 내가 한창 어려운 시기였다. 그 어려운 때에 왜 내가 그런 만용을 부렸을까? 어느 아가씨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 나이 20살도 안 된 그 아가씨가 집을 나온 아가씨였다.


만나고 알고 사랑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 하였던가?
이십대 후반과 십대 후반이 어울렸으니 마음에 연심이 일어난다고 해도 크게 잘못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당시 연심보다는 정의심이 앞섰다.  어린 아가씨가 집을 나와 떠도는 것은 잘 못 된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 아가씨를 설득하고 또 설득하였다.


결국 그 아가씨는 나와 동행하여 집으로 가기로 하였다.
경북 울진군 해평읍. 1970년대 당시는 해평면이었던가? 참 머나먼 길이었다. 포항까지 가서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울진으로 가야하는 여정이었다.  시골 읍(면?)소재지에서 멀지 않은 데 그녀의 집은 있었고, 그녀의 아버지는 그 소도읍의 어떤 기관장이었다.


경북 울진, 수학여행 때 백암온천과 석류굴을 가본 것이 전부인 나로서는 그도 큰 모험이었다. 그녀의 집에 들어서자 난리가 났다. 오래토록 소식이 없는 딸이 왠 낯 모를 사내를 달고 들어 섰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졸지에 나는 그 집에서 예비 사위가 되고 말았다. 설명을 드릴 시간 조차 없이 어른께 인사를 하라고 강권하여 그녀 아버지의 손에 끌려 그녀의 할아버지 께 큰 절로 인사를 올려야 했고, 이어서 아버지 어머니 께도 인사를 드려야 했고, 무슨 심보였을까? 내가 정색을 하고 그 게 아니라고 설명을 드리려고 하였으나 그녀의 제지에 가로 막혔다.


다음은 동네 어른들 차지였다.
누군지도 모르는 분들께 자꾸 큰절로 인사를 드려야 했다.
정의감이라지만 멀리 원행한 것에 모자라 졸지에 예비 사위가 되어 어른들 께 모두 인사를 드려야 했으니 이 것이 화였을까? 복이었을까?


거기를 떠나온후 또 몇 해 동안 편지가 오고 갔다.
내가 30대로 접어들면서 이제 편지 그만 나누자 하고.. 그런 이별도 있을까 다시 멀리 포항까지 가서 힘들게 얼굴을 마주 보며 이별을 하였다.

 

                                < 경북 울진군 평해읍 망양정과 망양정에서 바라본 망양 해수욕장 >


 

( 흐르는 노래는 가을음악 41곡 입니다. 연주기와 곡목은 댓글 신청 바랍니다. 링크한 음악은 언제 링크가 풀릴지 몰라..)

 

 

 

 

 

기억. 이렇게 글로 쓰면서 생각한다.
앞으로 좀 더 자세히 써야지. 한 줄이라도 써 놓으면 자꾸 더 생각이 떠오르고 보충하면 또 생각이 떠오르고,
그렇게 옛일을 조금씩 기억해 내는 것도 뇌의 활동이겠지. 이런 것으로도 뇌세포가 늘어나고 뇌가 건강해 지는 것이겠지......


 

 

 










.밝 누 리.

[밝은 우리의 온 삶터]

-밝은 밝음이며, 온은 따뜻함(溫)이고 모두(全 온통)이며, 누리는 살아가는 세상이고 살아가는 역사 입니다-

Posted by koreanur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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